계속
골치 아픈 영화만 보다 보면 머리가 아파질 때가 있다. 나쁜 놈은 사연이 또 왜이리 많고 도대체 이
감독이 보는 세상은 왜 이리 불행한지. 해피엔딩이더라도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너무 힘이 들면 보는 사람도
지치기 마련인데, 파국적인 결말을 좋아하는 나로서도 이런 작품들만 보다 보면 좀 기분좋아지는 영화를
보고 싶어 질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세 얼간이> 같은 영화라던지.
<it’s kind of a funny story>도
리프레싱 하고 싶을 때 보면 좋은 영화이다. 스토리는 간략하다. 성공에
대한 강박으로 우울증에 빠진 평범한 남학생 크레이그가 이를 이유로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그리고
그가 병동 내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나면서 성장해나가는 이야기이다. 우울증에 걸린 소년이라지만 부모가
죽었다던가 성폭행을 당했다던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아 내가 이렇게 공부를 못하면 난 나중에 루져가 되어
망하겠지’ 정도의 상상이 전부. 또한 영화의 전개나 색감
자체가 너무 발랄하지도, 또 너무 쳐지지도 않는 선에서 잘 진행되어 보고 나면 기분이 깔끔해지는 영화다.
..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아릿한 여운이 남아서 생각을 해보니 주인공의 멘토 역할을 해줬던 인물 바비가 문제였다. 끊임없이 주인공이 지닌 재능에 대해서 격려하고 깨닫게 해주는 털털한 동네 횽아 같은 바비가 왜 정신병원에 들어왔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명백한 단서는 그가 자살을 수 차례 시도했다는 것이고 어떤 이유에선가 헤어진
가족과 다시 같이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크레이그를 끊임없이 북돋아주고, 크레이그는 바비의 격려를 포함한 몇가지 훌륭한 관계들 덕에 우울증을 극복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문제는, 크레이그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작은 행복을 깨달으며 병원에 나설 때 바비는 소년이 떠나는 모습을 아주 쓸쓸한 표정으로 쳐다본다는 것. 마치 ‘나에겐 이제 저런 기회가 없겠지’라는 표정을 짓고서 보는 그 모습이 다시 돌려보니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의 아버지가 마지막에 탄광으로 가는 그 모습 같았다. 꼭 청춘이 문제가 아닐 지라도 우리는 종종 그런 일들을 겪지 않던가. 나보다 아무리 봐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 이들, 기회가 많고
빛나는 이들이 지금 힘들다는 이유로 위로해줬던 기억. 그리고 그 위로 후에 우리 스스로가 왠지 비루해지는
기분들. 그런 기분들을 영화 전체의 1/10도 안되는 장면 덕에 다시 떠올리고 씁쓸해져버렸다.
나는 이 영화가 기분은 좋게 해주지만 그다지 기억에 남기기는
어려운 영화라고 생각했다. 아주 모범적인, 때문에 아주 평범한
영화라고 생각했지만 (메시지라는 것도 다 그런식이다. 자신의
작은 행복이 얼마나 큰 행복일 수 있는 지를 설파하는-) 바비의 우울한 표정 하나 덕에 훨씬 풍부한
영화가 되었다. 그 남자도 언젠가는 저 소년처럼 빛나는 시절이 있었겠지. 남자는 소년을 격려해줬지만 사실은 소년을 부러워했을 게다. 그 청춘이
탐이 나서. 소년도 살아가다 보면 청춘을 탐낼 것이고, 하지만
다시 올 수 없음에 슬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