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지 국가'라는 사고(더 적절하게 말하면 카스텔이 주장하는 사회국가-개인과 집단의 삶에 닥친 사회적으로 생산된 위험을 저지하고 무력화하는데 애쓰는 국가)는 개인적 위험을 '사회화'하고 이러한 위험의 감소를 국가의 임무와 책임으로 삼겠다는 의도를 천명한 것이었다. 국가권력에 대한 복종은 국가가 개인의 불행과 재난에 대비한 보험 증서를 보증하는 것에 의해 정당화 되었다.
지금 정치 권력에 대한 그러한 공식은 과거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복지 국가 제도는 점점 해체되고 퇴출되는 반면, 비즈니스 활동과 시장에서의 자유경쟁,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에 부과되었던 이전의 제약은 제거되고 있다. 국가의 보호기능은 고용이 불가능한 소수의 사람들과 병약자들만 포함할 정도로 차츰 줄어들고 있으며, 이러한 소수 집단마저 사회적 보호 문제가 아니라 법과 질서의 문제로 재분류되는 경향이 있다. 시장의 게임에 참여할 수 없는 무능력이 갈수록 범죄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국가는 자유시장의 논리(또는 비논리)로부터 야기되는 취약성과 불확실성에서 손을 떼고 있으며,
이제는 그러한 문제들을 사적인 문제로, 개인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자원으로 다루고 대처해야 할 문제로 재정의 하고 있다. 울리히 벡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이제 개인들은 체계의 모순에 대해 전기적인 해결책을 찾아내도록 기대되고 있다.
...시장이 만들어낸 불안전성에 대한 과거의 계획적인 개입을 폐지하거나 심각하게 감축하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 그러한 불안정성의 영속화와 강화가 국민의 복리에 헌신하는 모든 정치 권력의 목표이자 의무라고 선언하면서 오늘날의 국가는 다른 비경제적인 유형의 취약성과 불확실성을 찾아내 자신의 정당성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
시장에서 발생한 생계와 복지의 위협 요소와 달리 개인의 안전에 대한 위협의 정도는 집중적으로 홍보되고 가장 암울하게 채색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위협이 현실화되지 않은 것이 정부 기관들이 경계와 주의와 선의를 기울인 결과로 나타난 대단한 일로 칭송될 수 있다."
"..취업 지원자들은 매우 엄격한 심사과정을 거쳤고, 매사를 절박하게 행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정말로 매사에서. 그것은 일회성의 시험이 아니었으며 엔론에서의 삶은 절대로 중압감이 누그러지지 않는 시험의 연속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뢰가 누적되는 일은 없었고, 아무리 인상적인 성공의 기억도 어제의 '대성공'이 또다른 더 눈부신 대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 다음 날 아침이면 사라졌다..
...직원들의 절대적인 헌신이 요구되었으나 일자리는 오래 가지 않았다..회사 생활은 잉여 인간으로 전락하는 벼랑 끝을 맴도는 생활이었고 날마다 쓰레기 처리를 시연하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누구든 쓰레기로 처리되는 순서가 닥치는 것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불의의 재난이라기보다는 긴장의 해소로서 환영받을 수 있었다.
'너무 치열한 회사의 업부 문화'가 직원들의 사기와 내적 단결력을 파괴했다. 또한 그러한 문화는 미래에 그들이 쓰레기로 배정되는 것과 그런 미래가 실현되도록 만드는 현 상태에 저항할 힘을 약화시켰다.
자기 책상을 정리할 시간이 왔을 때..그런 직원들이 집으로 가져갈 수 있는 유산으로 남아 있는 것이라곤 권력의 자리와 쓰레기 더미, 영광의 순간과 굴욕적인 실패, 명예로운 휘장과 오욕의 낙인, 그리고 따뜻한 포옹과 차가운 거부를 나누는 선이 얼마나 가늘고 취약한 것인가 하는 깨달음, 소박하지만 의심할 나위 없이 유용한 깨달음 뿐이다....무슨 일을 하든 선택지를 남겨두어라. 충성의 맹세는 '장기간'에 대해 걱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운한 사람들의 것이다.
..보다 정확한 표현이 없어 '지구화의 힘들'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겉보기에 무작위적이고 임의적이고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이동하고 떠돌고 있다. 이 힘들은 지속적이고 신뢰할 만한 안전성의 닻들이 드리워져 있던 낯익은 풍경을 알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예고도 없이 바꾸어버리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자리를 뒤바꾸고 사람들의 사회적 정체성을 뒤흔들어 놓는다...
이 힘들이 우리 집의 문전에서 이미 거부되었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치거나 생계 수단을 구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야 했고, 정체성과 자존심을 박탈당한 사람들을 내다버릴 때 우리는 이 힘들을 상기하게 된다. 우리는 그들을 미워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 눈앞에서 겪고 있는 상황은 곧 맞이할 우리 자신의 운명을 시연하는 것 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을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려고 열심히 애쓰면서-그들을 체포하고 수용소에 가두고 추방함으로써-이 유령을 쫓아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종류의 공포를 쫓아버리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에 불과하다."
" 리처드 새닛의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최첨단 테크놀로지의 본산이자 현대판 멋진 신세계의 전진 기지인 실리콘 밸리에서 평균 고용 기간은 직종을 불문하고 약 8개월이다. 이것이 바로 지구촌 시민 누구나가 부러워하고 열심히 모방하려고 애쓰는 더없이 행복한 삶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기적인 계획을 생각하는 것은 확실히 말도 안된다. 그리고 장기간에 대한 생각이 없는 곳,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라는 기대가 없는 곳에서는 운명을 공유한다는 느낌도, 형제애도, 대열에 합류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발맞추어 행진하려는 충동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연대감이 싹트고 뿌리내릴 가망은 거의 없다. "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