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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공연

[0311]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텍사스,마초,호모포비아 아저씨가 에이즈에 걸린다는 설정도 흥미롭지만 캐릭터의 입체성이 매우 매력적이다. 우드로프는 영웅적이지도, 선하지도 않다. 그가 움직이는 동기는 현실적 이익이나, 그것이 공공선을 이끌어낸다는 스토리도 흥미롭다. 이 영화의 미덕은 이런 류의 실화를 다룰 때 흔히 빠지는 '억울한 이들은 선하다(혹은 선해야만 한다)'라는 설정의 유혹을 깨뜨린 데에 있다.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바에서 지엽적인 걸 수는 있지만, 나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보며 타인에 대한 윤리를 생각했다. 우리는 '동성애자는 우리의 친구입니다' '피해자들은 우리의 가족입니다'따위의 사해평등적이고, 세계시민적이며, 그러나 결국 기만적 문장을 내뱉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의 어찌할 수 없는 정체성을 이유로 그를 차별해서도 안되지만, 같은 이유로 그와 우정을 나눌 필요도 없다. 우리는 그가 친구가 될 만한 이면 친구가 되고, 사업 파트너가 될 만한 이면 파트너가 되며, 호로자식이면 인연을 끊고 살아가면 그만일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을 경험하거나 인지하는 것이다. 낭만적인 편견은 필요치 않다. 우리에겐 아직까지도 '계몽'이 중요하다. 물론 그 계몽은 우드로프와 같은 마초가 자신은 절대 걸릴 일 없다 믿었던 에이즈에 걸리는 것 만큼의 쇼크를 동반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 끝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들이 존재한다. 한 사람의 호모포비아가 동성애의 병이 아닌, 하나의 질병으로서 에이즈를 인식하게 되는 순간. 다른 호모포비아에게 자신의 게이 파트너를 악수시키는 순간 말이다. 그 순간들 속에는 우리가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가장 올바른 모습이 나와 있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와 같은 윤리적 태도와 별개로,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 실화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현실에 대입되는 측면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고 나서 복잡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국가가 개인의 의료행위를 보장해준다는 지침 아래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방법들이 사용되는 것을 허가한다면, 그것 또한 정부의 무책임함이 아닌가?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결말은 주의깊게 살펴보지 않는다면 '정부의 규제는 나쁘다'라는 상황인식을 의약품 이슈가 아닌,모든 영역에 흩뿌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이 영화는 지극히 미국적인 색채를 띄는 것 처럼 보인다. 여기서 미국적이라는 말은 '규제'와 '공공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의심과 같은 말로 바꿔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AZT의 현재 쓰임에 대해 이야기 하며 영화가 끝난다는 점, 단 한번도 FDA가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직접적인 묘사가 없었다는 점 등을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이 영화는 현실적인 법의 테두리와 한 인간으로서 살기 위한 구제책이 어떤 균형점을 잡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 혹은 묘사로 이해하는 것이 더 맞는 게 아닐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매경이니 한경이니 하는 경제지들이 이 영화에 대해 "정부의 행정편의가 문제"라고 결말을 맺는 것과 같은 입장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나의 과민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이 영화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영화평에 묻어가고 싶은 어떤 의도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진보주의자도, 보수주의자 모두가 좋아할 영화지만, 가져갈 말들은 천차만별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