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과 오줌의 존재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를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말처럼 '똥과 오줌의 존재'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이 말이 거부감이 든다면, 영혼을 가졌지만 결국 먹고,싸고,자야하는 몸을 가진 존재라는 말로 바꾸어도 무리는 없다. 아무리 고상한 일들을 하더라도 사람이 처한 이 물질적인 조건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라 몸을 가진 이상, 사랑하는 대상을 계속 확인하고,만지고,느껴야만 우리는 사랑을 유지하고 키워나갈수 있다.
물론 사랑에 대해서는 두가지 입장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플라토닉이 가능하다는 관념론. 다른 하나는 몸 없이는 마음도 없다는 유물론. 아이러니하게도 전자는 결국 갈증에 시달리다 이별을 택하고, 후자는 뉴스에서 '호르몬이 결핍되면 사랑도 없다'라는 기사를 인용하다 사랑 자체도 찾지 못하곤 한다.
현실적인 연애 경험을 제공해서 화제가 되었던 <러브플러스>
진짜일지 모르지만 비어있는.
사랑에 있어 정신과 몸 둘 중 하나가 없는 것은 우리에게 왠지 모르게 도착적인,혹은 결핍되어 있는 느낌을 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몇년전 화제가 되었던 <러브플러스>라는 연애게임에 빠진 이들에 대한 뉴스나, <화성인 바이러스>에 나왔던 애니메이션 쿠션을 사랑하는 남자에 대해 우리가 느꼈던 감정들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Her>의 사만다에 대한 테오도르의 사랑 또한 이와 같을지 모른다. 가짜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진짜일수도 있지만, 무언가 비어있는 진짜라는 거다.
물리적으로는 포켓 속 기기로만 존재하는 사만다와의 균형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는 꼭 인공지능을 들고 나오면서까지 입증할 문제는 아니다. 결국 사람 대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우리가 유년기, 청소년기의 연애를 생각하면 부끄러워지는 것은 그것이 어떤 균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몸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불순하게 느껴졌거나, 혹은 몸만을 생각했거나. 플라토닉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그 때 말이다.
<Her>의 연애가 보여주는 위기감은 롱디커플의 그것과 비슷하다.
서로간의 터치가 소원해지면, 대화가 소원해지면, 몸도 마음도 결국 나와 멀어지는 타인으로서의 모습이 부각되면 부각될 수록 우리는 결국 그 사람과 사랑하기 어렵다. 둘이 같이 시작하는 연애에서 균형이 깨지는 순간 재발견되는 것은 결국 나의 자아이고, 이 순간 더이상 사랑은 지속될 수 없다. 그렇게 본다면 헤어지는 연인들이 상대를 잡기 위해 말하는 '그냥 곁에만 있어줘'라는 말은 내 터치에 반응하는 연애시뮬레이션 게임보다도 못한 것이다. 하물며 균형없는 상태에서 시작한 연애란 굳이 말하여 무엇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