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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2/6)

김영하 단편집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에 수록된 단편 [바람이 분다] 중.


"우리, 떠나요,

길고 따뜻한 정사가 끝난 후에 그녀가 또박또박 힘을 실어 말했다. 컴퓨터에 연결된 스피커에선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첼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콤팩트 디스크의 발명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했다. 나는 이런 CD가 좋다. LP의 추억 따위를 읊조리는 인간들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LP의 음은 따뜻했다고, 바늘이 먼지를 긁을 때마다 내는 잡음이 정겨웠다고 말하는 인간들 말이다. 그런 이들은 잡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잡음에 묻어 있을 자신의 추억을 사랑하는 것이고, 추억을 사랑하는 자들은 추억이 없는 자들에 대해 폭력적이다. 한때 내가 사랑했던 산울림과 들국화의 앨범들을 부숴버리면서 아버지는 말했다. 그건 음악이 아니라 소음이다. 천박하다. 그런 걸 듣겠다고 용돈을 써버리다니. 아버지의 진공관 앰프로는 바그너가 출렁거렸지만 실제로 진공관 속에서 원심분리되던 이는 다름아닌 아버지 자신이었다.

오래 전부터 CD의 세계에서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오다보면 CD에도 기억이 깃든다. 음의 신호를 1초 간에 44,100으로 분해하고 그 하나하나의 크기를 약 65,000단계의 16비트 디지털 숫자로 나누어 기록하는 그 미세한 틈 한구석에도 온기가 남아 삶을 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