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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

[03/05] 거절에 대하여


  누군가에게 '거절'당했을때 택할 수 있는 양 극단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까지(실제로는 그렇게 믿는 것에 가깝지만) 상대의 요구에 맞추려는 것과(단. 이 경우 상대가 자기를 '거절'하겠다는 요구는 포함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은 채 그 자신을 온전히 좋아해줄 누군가를 찾는 것이다. 전자의 끝에는 폐허가 된 자신이 있을 뿐이고 후자의 끝에는 뒤틀린 자아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 둘은 타인의 거절을 견딜수 없다는 점에서 그다지 다르지 않다. 나는 결국 둘 다 퇴행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란 그 중간의 어떤 것이다. 내가 맞춰야 할 것이 무엇이고 내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고민할 수밖에 없다. 꼭 인간관계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실 사는 게 다 그렇다. 쉬운 이야기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지킬 것인가? 그 기준이 무엇인지는 끊임없이 변하겠지만. 결국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 나은 나의 삶이 아니라 단순히 "누군가를 위해서"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이런 사고들과 실천들을 할 수 있는 것도 결국 어떤 특정한 환경 내에서의 축적된 경험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나 자신이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것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다른 이들을 경멸하거나 무시해야 할 이유는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너무나 약하고 변덕스럽다. 우리의 사고와 감성이 세상을 생각하더라도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삶은 온전히 우리 자신만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절의 상황에 자기 자신을 극단으로 몰아가는 사람들을 경멸하거나 무시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사회적인 격리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삶에서의 인간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세상 모두는 애정이 필요하다. 정말 그렇다. 그러나 정말 애정이 필요한 누군가는 그 애정을 가지기도 지키기도 어렵다. 사실 모두에게 애정이란 그런 것이지만 가꾸고 지키는 것이 유난히도 힘든 이들이 분명 존재하는 법이다. 나는 사실 애정이란 자본이라는 것보다도 더 가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평생 가질 수도 없고, 노력한다고 가질 수도 없는. 그렇지만 분명 편향되게 존재하여 사람들을 나락에 빠뜨리는 것이야 말로 바로 애정이 아닌가?


  친한 이의 비극적인 글을 읽으면서 꽤 오래 전부터 연락이 끊긴 어떤 이를 생각했다. 10대때부터 만난 그는 상당히 피곤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하고 거절당할시 양 극단중 하나로 달려가는 사람이었다. 그의 그런 태도들은 사실 구체적으로 언급 할 수 없는 그가 겪은 어떤 특정환 환경의 산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그의 행동이 분명 환경의 산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배운 자니 나이가 든 이상 "자신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하는게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왜냐면 그의 양 극단을 달리는 행동이 우리 각자의 삶에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들이었으니까. 이와 비슷한 어떤 이들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만한 짓들을 하기도 한다. 물론 그것을 옹호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왜 일어났는지는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거다.


 어쨌든 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가 하지 못한 선택이 아니라 하지 않은 선택에 대해서 비난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스스로 택할 수 있었다면 왜 그랬겠는가. 스스로도 어찌 할 수 없는 순간들은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그 순간에는 우리가 배우고 다짐해왔던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진다. 그에게는 아마 그 선이 너무 낮거나 혹은 너무 많았던 것일게다. 


 그러나 그런 것을. 그러니까 그런 세계를 우리가 머리와 가슴으로 안다고 해서 우리 삶에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야 없는 노릇이다. 그 선들을 우리가 만들어 주기엔 너무나 늦었고 그 스스로 결국 해내기를 바랐다. 아니 사실 귀찮았고 지쳤다. 우리는 우리의 선을 신경쓰기도 바뻤으니까. 분명 그도 자기 의지로 행하여 자신 스스로를 바꿀 수 있는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순간이 어떤 순간이었는지 그는 알수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도 사실 몰랐다. 아니 그렇게 바뀌어야 할 일이 없거나 운이 좋아서 바뀔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아니 세상의 책임이니 그의 책임이니 우리의 책임이니 하는 것이 뭐 얼마나 딱 딱 무 자르듯이 나눠 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모든 게 엮여서 그의 행동들이 나온 것을.


 나라고,우리라고 얼마나 다르겠는가? 우리는 수없이 많은 순간을 잘못 보내고 나서는 늦은 밤에 자리에 누워 하이킥을 하거나 가슴을 친다. "왜 그때는 몰랐을까"  그가 그 순간들을 알 수 없었다고 해서,선택하지 않았다고 그의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물론 그가 그런 행동들로 인해서 끼친 어떠한 피해들에 관해서는 그를 비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해야 했는데 안했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비겁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도 잘 모르겠다. 여전히 극단을 오가는지. 거절을 두려워하는지. 문득 나는 누군가의 불쾌한 행동들. 그러니까 내가 감당할수 없는 행동들에 대해서 그들이 하지 않은 선택들에 대해 비난하거나 경멸하기 보다는 그냥 조용히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행동과 선택들을 "마땅히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것들은 결국 그것들이 불러올 결과들에 우리가 받는 영향들 뿐이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정말 외롭고 황량한 곳이다. 그리고 거기서 모든 비극이 나오는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