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마더
1.
이제 첫 작품을 내놓은, 최근작으로 치자면 <디스트릭트9>의 닐 블룸버그와 같은 감독이 아닌이상, 한 작품은 그 감독의 작품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는게 마땅하다. 특히나 봉준호 같이 일관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감독의 경우 그러한 해석이 상당히 의미를 가지는데, 예를 들면 플란더스의 개와 살인의 추억,괴물을 관통하는 일관된 세계관은 부당한 힘에 의해 피해받는 약한 자들,혹은 정의로운 자의 연대 라는 다소 이분법적인 세계관이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그 안에서 최대한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상태를 디테일하게 재현하는데에 봉준호의 매력이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는 다소 책임을 묻는 식으로 제기되었던 플란더스의 개와는 달리 살인의 추억과 괴물에서 다소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그에 비례해 약자에 대해 가해지는 부당한 힘은 더욱 노골적으로 묘사된다. 그것이 백광호를 폭행하는 무능한 조용구의 워커이건,살인자 수색시간에 경찰력의 동원을 막은 대통령의 행차이건 혹은 바이러스 감염을 빌미로 강두를 잡아건 정부와 미군이건 간에 사실 그 근본적 구도는 너무 노골적이고,이러한 노골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해준 것은 봉준호의 영화적 연출력에 기인하는 바가 컸다.
즉, 피해자는 선이요 가해자는 악이라는 단순한 세계관에 봉준호의 디테일을 통해 현실의 외피를 입혀놓았지만 사실 세상이 어디 그렇기만 하던가? 괴물과 살인의 추억의 차이는 사실 재현이냐,아니면 가상의 존재를 통한 현재에 대한 환기냐의 차이일뿐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그 맥락을 같이한다. 살인의 추억이야 그나마 다루고 있는 시대가 워낙 절대악이 존재하던 시기였고 악의 일부였던 형사들의 변화가 묘사되어있기에 나름의 현실성을 가지지만 <괴물>에서 묘사되는 모습이란 사실 거의 전래동화에 가깝다.
2.
그런데 마더에 들어서면 봉준호는 다소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비인기스포츠를 운운하며 원빈의 입에 물린 사과를 뽀개는 형사는 여전히 공권력의 부당한 외압을 "어느정도"는 상징하지만, 사실 영화의 막판에 가면 드는 비감은 살인의 추억이나 괴물에서 느꼈던 비분강개가 아닌 가슴이 서늘한 어떠한 종류의 자괴감이다. 전자는 바깥의 적에게 느끼는 것이며 후자는 자신에게 느끼는 것이다.
부당한 피해를 당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부당한 피해가 아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의 인권침해의 디테일은 별개지만 관객 입장에서 당연히 약자라고 생각했던 자가 '선'이 아니라는 충격적 진실을 마더는 제시한다. 그리고 여기에 봉준호의 변화가 있다.
직설적으로 말해,봉준호가 마더에서 묻는것은 결국 다음과 같다. 세상이 잘못되어 있는 것에 우린 책임이 없는가?
사실 마더에서 보이는 주요 인물들의 모습속에는 괴물에서 나왔던 연대감이나 살인의 추억에서의 버디무비에 가까운 우정과 열정은 온데간데없이 붕괴에 가까운 자중지란만이 존재한다. 가장 극단적 피해자인 문아정은 그저 관찰과 탐닉의 대상일 뿐이고,진태는 호시탐탐 어떻게 하면 엄마를 등쳐먹을까 하는 궁리만 하며-또 실제로도 성공하고-엄마 자신도 그것이 실종된 남성성에 대한 갈망이건,진심어린 아들에 대한 사랑이건 간에 도준에 대한 집착으로써 눈이 멀어 결국 고물상 아저씨를 광기에 휩싸여 살해한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마더에서 느꼈던 답답함이란 아마 여기에서 비롯된 것일테다.
3.
근데 사실 봉준호의 전작의 연장선상이라면 이러한 결말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도준은 뭔가 누명을 쓴 것이고 경찰은 계속 뻘짓을 해서 피해를 줘야 한다. 피해자=약자=선이니까. 근데 <마더>에서는 가장 밀접한 관계여야 하는 도준과 엄마의 관계마저도 어린날 트라우마로 점철되어있는 증오의 관계에 가깝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는 계속해서 불투명하다. 사실 여기서 가장 순수한 존재,괴물에서의 어린 딸과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피해자이자 정의의 상징으로써 괴물의 강두나 살추의 형사들에 비견되는 존재는 도준의 손에 "남자가 싫어!"라고 말하고 죽은 문아정 혼자 뿐이다.
도준에게 죽은 문아정이 상징하는 사회의 폭력성. 그리고 도준의 약자적 위치에 상관없이 도준이 가지고 있는 성적인 집착과 문아정에게 돌을 던지는 모습에서의 가해성,그리고 고물상이 그걸 목격하게 된 계기가 문아정과 "자기"위해 가해자로써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 그리고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 광기에 차서 엄마가 고물상을 죽였다는 사실,그리고 엄마와 도준을 사회적 약자로 내몰아 박카스를 먹일수밖에 없던 배경. 종국에 엄마를 미치게 만드는 도준의 영리함.
그 모두의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위치. 이 모든 것들이 영화 내에서 마지막에 하나의 순환고리를 이루면서 질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이 고리의 축에는 사실 도준이 아니라, 모두의 가해성을 비추는 거울로써의 문아정이 존재한다.
그 거울이 묻는 것은 이 모든 사태는 정말 우리의 책임을 넘어선 "부당한 힘"이 존재하기 때문인가? 이다. 억울한 도준이네 가족을 공권력이 괴롭혔나? 문아정을 부당한 경찰이 죽였나? 괴물이? 정부가? 그 일부를 이루고 그것을 탄생시킨 우리 자신이 문아정을 죽이고 문아정을 노리개로 삼지 않았는가? 정말 중요한간 우리를 억압하는 저 어떠한 계급이 아니라 우리 자신안의 무언가가 아닌가? 여기서 가해자들 중 그 누구도 특권층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패경찰의 군홧발보다 서로의 야차적 욕망이 더 섬찟하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를 명확하게 가르기 위한것이 엄마의 여정이었지만 마지막에 그 모든 여정은 엄마 자신도 가해자로 변하며 결국 애시당초 불가능했음이 드러난다
그래도 잡아야 하고 책임을 물어야 하는 악마가 외부에 뚜렷하던 <플란더스의 개>와 <살인의 추억>의 시대를 거쳐,현상금을 위해 동료를 고발하고 정부 발표에 강두네 가족을 신고하며 슬슬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낭만적일수 있던 <괴물>의 시대를 지나, 결국 우리의 사회는 우리 속에 악마를 품고 사는 자중지란의 <마더>까지 온 것이다.
4.
이 세계에서는 <살인의 추억>에서 잡히지 않았던 살인마도. <괴물>에서의 괴물도. <플란다스의 개>에서의 경비원도 존재하지 않는다. 형사들끼리 죽이고,가족들끼리 죽이며,아파트 사람들끼리 개를 잡아먹고 숨긴다. 약자가 약자를 잡아먹는,우리에게 부당한 힘을 가하는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우리이기에.과 연 우리 안에는 괴물이 없느냐? 라고 봉준호감독은 끊임없이 묻는다. 서로를 죽이는 것은 서로이다. 이것은 결코 모성에 대한 고찰이 아니며-광기적 측면에 관한것이라면 모성을 넘어선 한국사회의 그 '어떠한 본성'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봉준호의 자포자기적 영화도 아닌, 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성찰에 관한 영화다. 괴물은 한강에 출몰하는 독자적인 외부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부이다.
엔딩으로 빨리감기를 해보자. 김혜자의 마지막 춤이 상징하는 것은 저렇게 죄를 지어가면서까지 아들을 사랑하려는 '모성애'에 대한 상징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모성의 상징이라면 다른때도 아니고 왜 원빈이 침통을 건네주었을때,즉 자신의 죄를 직시하게 되었을 때 혈자리를 놓고 춤을 추었는가?
결국 엄마가 놓는 마지막 혈자리는 우리 자신의 죄책감의 망각에 대한 이야기로 치환된다. 알고나면 다 잊어버리고 싶을정도로 괴롭지만,외면하면 관광버스안의 춤사위마냥 정신없이 즐거운 현실들. 더군다나 마지막 실루엣은 엄마가 누구인지도 보이지 않기에 그 안에 또 누군가가 엄마와 같은 일을 겪었을지 모르고,엄마가 누구인지도 구분하기 힘들다는 것을-가해자와 피해자의 혼재를 은유한다.
엄마가 허벅지에 침을 꽃는 순간, 망각의 산고속에 괴물이 탄생했고 그 괴물들이 스크린속에서
춤을 추고 있으며,봉준호는 그 순간 우리 자신의 괴물을 어느정도 직시할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자신이 해석해낼수 있건 없건,
우리가 마더를 보며 느끼는 크고 작은 자괴감은 그러한 의식에 기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