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김지하의 자만심.

leedong 2012. 11. 27. 09:57




 김지하 시인이 박근혜 지지를 사실상 선언했다. 어떤 이들은 심드렁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치던 시인이 이렇게 되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냉정하게 90년대 이후 김지하의 행적을 생각해본다면, 그가 박근혜를 지지한다고 해서 이상할 일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는 이미 91년 "굿판"발언을 시작으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들에 대해서 관심을 끊었고. 촛불시위에 대한 '횃불'발언으로 현실감각이 땅에 떨어졌음을 보여준 적 오래다. 

 복잡한 세파속에 우리는 지식인들이 언제나 한결같길 바라지만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특정 시대에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 하고 나서 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의 예는 진중권이 있을 것이고..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김지하와 같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가능했지만 지금에까지 김지하에 대해 그런 소명을 바랄 수 있을까?


  그가 '오적'과 '타는 목마름으로'를 쓴지도 벌써 3~40년이 지났다. 오적의 문제인식이 빛을 발했던 것은 7-80년대의 이야기란 거다. 그가 성취하고자 하던 '민주주의'는 이미 87년에 완료되었다. 완료된 프로젝트에 집착할 이유가 무엇인가? '난쏘공'의 조세희가 아직도 변함없이 투쟁을 하는 이유는 그가 바라는 사회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김지하는 참 행복한 지식인이다.


 박근혜에 "여성대통령"을 바라는 김지하의 한숨 나오는 인식은 80년대 항쟁을 겪은 이들이나 90년대 이후에 각종 진보적 이론의 세례를 받은 이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한심한 일이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삶을 생각해보면 그리 불가능한 인식도 아닐 것이다. 진보 원로들의 문제인식이란 것은 항상 크게 두가지 아니었던가. 1) 세상에 아직 해방공간과 87년의 문제만이 남아있다고 생각하거나, 2)그 모든 것이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하거나.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다고 봉건제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안철수나 문재인이 집권한다고 경제민주화가 실현되는 것도 아닌 상황이다. 그런 마당에 박근혜를 지지하는 것을 어떤 '반 민주적인 태도'로 모는 것 자체가 이미 반민주적인 태도일 것이다. 이것은 김지하가 오적이 아니라 '노동의 새벽'을 썼다 치더라도 상관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가 말하는 '용서'의 화법일 것이다. 보수파로 전향하는 지식인들은 자신의 전향에 항상 '나는 다 용서했다'는 알리바이를 달고서는 사회의 불화를 자신 개인의 문제로 치환시킨다. 여기서 나오는 착시효과에 넘어갈 이들이 몇이나 되겠냐만은, 그런 그들의 자만심 가득한 태도가 마음이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김지하가 비판받을 지점이라면. 아마 그러한 부분이 아닐까.

 p.s
 나이든 진보적 인사들이 생명운동이니 생태운동이니 하는 게 나는 왜 이리 불편한지 모르겠다...아니나 다 를까. 김지하가 그렇게 생명 타령을 하더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