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그리고 북한.
중학교 3학년 시절 아버지와 어느 두부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격렬하게 악수를 하는 영상을 티비에서 틀어줬던 기억이 난다. 생방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가 "진짜 대통령 잘 뽑았지..통일도 멀지 않은것 같네"라는 말씀을 하셨던 기억은 생생하다. 그 말씀이 지극히 낭만적이고 순진한 바람이었음을 지난 시간이 입증해주고 있지만, 많은 이들이 아버지와 같은 생각을 그날 하고 있었을 것이다.
늘상 햇볕정책을 주장해온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이상 북한과의 평화무드는 시간문제였다. 지금처럼 북핵에 남북관계가 파토난다 어쩐다 하는 분위기랑은 사회 분위기 자체가 판이했다. 때문에 그가 당선된 97년을 전후로 하여 평화에 대한 열망과 북한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많은 작품들에 투영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이데올로기적이지만 매력적인 북한군을 보여주기 시작한 99년의 <쉬리>와 형제애를 지닌 이들이 뿌리깊은 체제의 현실 앞에 좌절하는 <JSA>. 그리고 그야말로 민족주의적 낭만의 극치를 보여준 <동막골>까지 김대중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북한을 인간적 대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들이 투영된 영화가 만들어진 시기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렇듯 북한이 긍정적인 주제로 다뤄지던 시기가 있었다.
한 시기가 절대악으로서 북한을 상정했던 시기라면. 그 후의 시기는 언제든지 화해가능한 형제로서 북한을 상정했던 시기였다. 화해했어야 하는데, 외부의 간섭과 욕심 때문에 우린 제대로 만나지 못했어-라는 것이 아마 그 시기의 북한을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평화를 지향하는 이들이야 후자쪽이 더 이상적인 세계인식으로 보일테다. 그러나 두 시점 다 꼭 필요한 현실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 결여 지점은 '북한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그들 또한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라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당연한 포인트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포인트가 메이져 작품들에 의식/무의식적으로 반영되기 까지는 1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10년 간 두차례의 민주정부 실패로 인해 경제침체가 몰아쳤고 보수화가 진행되었다. 더불어 햇볕정책과 무관하게, 그리고 햇볕정책이 종료된 후 북한의 도발들이 계속 발생했다. 더이상 '북한 따위'는 피부에 와닿는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피부에 와닿는 문제는 무엇인가? 북한과의 민족적 화해나 외세를 몰아내는 일 따위가 아니라 당장의 먹고사는 문제가 제일 큰 문제다. 남북관계를 다루면서 이에 대한 촉각을 가장 먼저 드러낸 메이져 영화는 <의형제>였다. 전직 국정원 요원의 송강호와 끈떨어진 남파간첩 강동원의 버디무비로 압축할 수 있는 이 영화의 군상들은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늑대나 역적패당도,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한 인간도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틈틈히 그들의 현실인식을 방해하지만 돈의 논리는 그 이데올로기를 쳐부순다. 마지막에 두 주인공은 화해를 이루어내지만 그곳은 이데올로기를 극복한 곳이라기보다는 대립을 포기하고 회피한 것에 가깝다. 너는 나. 나는 나. 그러나 우리는 형제. 정도가 의형제가 표현하는 남북관계일 것이다.
남북인의 모습을 다룬 이 영화는 적어도 그 시점에서만큼은 대중영화가 북한을 다루는 태도 중에 가장 현실적이고 완성도 있는 영화였다. 북한을 이념적 존재로 대할지, 형제로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그 시기의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영화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계속해서 끝간데 없이 먹고살기 팍팍해져가는 몇년 후. 드디어 <베를린>이 도착했다. 이 영화를 <JSA>나 <의형제>와 같이 남북관계를 메인으로 다루는 영화로 보는 것은 감독의 의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베를린>이 보여주는 남북인의 관계가 메인주제가 아닐지라도 현실의 북한 인식을 상당히 많이 반영하고-혹은 짚어내고-있다고 생각한다. <쉬리>에서 나타났던 강렬한 이데올로기도. <의형제>에서까지 포기하지 못했던 형제애와 설득의 시도도 <베를린>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베를린>이 취하고 있는 장르적 특성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전의 남북관계에 대한 묘사들이 감독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비춰졌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베를린>의 무미건조한 남북관계는 의도적인 무시라기보다는 건조한 설정이 더 매력적이고 설득력있는 시대가 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남북관계가 극에 삽입될때. 지금까지 그 어느 감독이 그것을 우회하거나 부차적으로 다룰려고 했었을까
<베를린>의 세계에서 북한은 어느 나라가 그렇듯이 돈에 시달리고 돈에 움직인다. 동명수의 캐릭터는 류승범이 그동안 가지고 있던 필모와 그의 이미지 덕에 독특해질수 있었지만 요소 자체는 '이해관계에 충실한 악당'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북한은 악당으로 표현될때 언제 어디서나 항상 '신념의 악당' 이거나 타협이 불가능한 '절대악'그 자체였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21세기에 모든 악당들이 자신의 욕망과 현실적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마당에 북한이 예외가 될 필요는 무엇인가?
표종성과 정진수-북과 남-은 더이상 서로를 설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북한은 예전같이 무조건 때려 잡아야할 주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민족이라는 허상적인 이유로 설득해야 할 형제도 아니다. 이해관계가 맞으면 합심할 것이요. 나를 방해하면 쳐낼 뿐이다. 이데올로기는 부차적이며, 설사 메인이라 하더라도 설득할 수 있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이해조차 필요없는 친근한 존재를 거쳐. 이해하려 했으나 실패한 존재를 지나, 이제는 이해 따위 필요 없는 존재로서의 북한이 나타난 것이다.
이해할수 없는 존재에 대한 대응은 무엇인가? 무관심 혹은 냉소일 것이다. 표종성은 정진수와 이해관계가 맞았기에 합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지만, 이해관계조차 없었다면 그저 어리석은 북한 신민이라는 비웃음만을 들었을 것이다. (련정희 납치 후 표종성을 대하는 정진수의 초반 태도를 생각해보자.) 그리고 지독히 지겨운 돈의 세계에서 먹고 살기 바쁜 우리가 북한에 대해 취하는 태도가 바로 냉소와 조롱그 자체다. 물론 나는 북한에 대한 이해가 어떤 낭만의 지점이라던가, 복구해야 할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글에서 북한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어떠한 도덕적 판단도 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그간의 영화들과 베를린이 보여주는 그 갭은 꽤 의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강렬한 이데올로기 전사 박무영(쉬리의 최민식), 아니 갈등의 송지원(의형제의 강동원)을 묘사했던 지난 방식들을 생각해보면 불과 3년이 지났을 뿐인데. 마치 몇십년은 지난 것처럼 아찔한 변화다. 그리고 이 묘사는 아마 지난 시간의 북한에 대한 어떤 묘사보다도 오랜 생명력을 유지할 것이다. 북한에 대한 이해 따위를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지금이 그 어느 시기보다도 가장 정확하게 북한을 이해하고 있는 시기이기에 그렇다. 사람들은 보수언론이 떠들듯이 북한이 남한을 지하에서부터 점령하고 있다고 믿지도 않지만, 민족주의 언론이 떠들듯 우리가 잘하면그들과 화해할수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굳이 꼭 북한을 '사회주의 이상' 혹은 '형제'나 '악마'로 대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것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런 인식은 이제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북한은 이제 더이상 메인 디쉬로 취급될만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랑 가스관을 연결해주거나 핵을 쏠때서야. 혹은 나와 내 주변이 군입대를 할때서야 어느덧 불현듯 나타난 '표종성'처럼 북한이라는 존재를 인지할 수 있게 되는 시대를 지금 우리는 살고 있다. 이것도 나름의 진보라면 진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