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염에 걸렸다.
에어컨 바람을 많이 쐬서 그런가, 요 근래 코 안이 자꾸 건조해서 결국 이비인후과를 갔다. 이리보고 저리보던 의사양반은 비염이라고 진단을 해줬는데..이게 알레르기성 비염이 아니라 '비중격 만곡증'이라는 증상이라고 했다. (나는 무슨 필살기 이름인줄 알았다.)
코 뼈가 한쪽으로 휘어져서 숨구멍이 막혀있는데다가 그로 인해 만성 염증이 발생해서....여튼 결론은 1. 코 안쪽 뼈가 휘었고, 2.원래도 뼈가 크며 3.그로 인해 계속 붓기가 빠지질 않아 만성 비염 상태가 되었다 뭐 이런거였다.
한번도, 단 한번도 비염이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가, 요 근래 조금 자각증상이 생겨 병원에 간 것 뿐인데 비염이라니, 그것도 아주 오래된 상태라니. 혹시나 수술하자고 이러는 건가 하는 마음에 언제나 그렇듯 다른 이비인후과들을 가서 진찰을 받아봐도 같은 결론이다.
반신반의 하는 나에게 의사양반은 일시적으로나마 코를 뚫어주겠다며 코 안에 깊숙히 거즈를 넣어줬다가 뺐다. 아마 나는 그 느낌을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20대 마지막에 이런 느낌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아, 원래 숨은 이렇게 쉬어야 하는 거구나. 호흡이 빵 뚫리다 못해 눈 앞까지 밝아지고 뇌까지 숨을 쉬는 듯한 느낌. 공기 통하는 소리가 빵!하고 들리는 듯한 느낌. 나는 원래 공기라는게 이렇게 많이 들어오는 건지 몰랐던 것이다. 십년이 넘도록! 어쩌면 평생 동안.
내 인생의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는 이 기분. 모든 실마리가 맞춰지는 소설 속 클라이막스 주인공이 된 듯한 그런 기분. 그래 문제는 의외로 간단한 곳에 있었다. 내가 삼수한것도 뇌에 산소공급이 충분치 않아서 그랬던 거고, 시력이 나빴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던 것이다.잠이 많은것도 살이 찐것도 이게 다 호흡이 곤란해서 그랬던 것임을...
거즈를 빼고 나니 얼마 후 그 느낌은 점차 사그러들었고, 의사는 콧속에 뿌리는 약을 일단 한달 정도 써 보고, 차도에 따라 수술을 한번 고려해보자고 했다. 수술이 꼭 필요한 건 아니며 개인의 필요에 따라 결정하면 된다는 정직한 말과 함께. 약을 타서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내가 한때 너무나 좋아했던 작가의 소설속 구절이 생각났다.
"어둠속에 머물다가 단 한 번뿐이었다고 하더라도 빛에 노출되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평생 그 빛을 잊지 못하리라. 그런 순간에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됐으므로, 그 기억만으로 그들은 빛을 향한, 평생에 걸친 여행을 시작한다. 과거는 끊임없이 다시 찾아오면서 그들을 습격하고 복수하지만, 그리하여 때로 그들은 사기꾼이나 협잡꾼으로 죽어가지만 그들이 죽어가는 세계는 전과는 다른 세계다.
우리가 빠른 걸음으로 길모퉁이를 돌아갈 때, 침대에서 연인과 사랑을 나눈 뒤 식어가는 몸으로 누웠을 때, 눈을 감고 먼저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몇 개의 문장으로 자신의 일생을 요약한 글을 모두 다 썼을 때, 그럴 때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과거는 몇 번씩 그 모습을 바꾸었고, 그 결과 지금과 같은 모습의 세계가 탄생했다. 실망한 사람들은 모르는 척 살아갈 뿐이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자! 그들에게는 그들의 세계가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세계가 있다. 이 세계는 그렇게 여러 겹의 세계이며, 동시에 그 모든 세계는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믿자! 설사 그 일이 온기를 한없이 그리워하게 만드는 사기꾼이자 협잡꾼으로 우리를 만든다 하더라도, 그 세계가 바로 우리에게 남은 열망이므로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