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빛의 제국
(르네 마그리트-빛의 제국)
-1-
자. 가정을 해보자. 우리 중 누군가는 지금 안드로메다 은하의 어느 혹성에서 지구를 조사하러 온 외계인이다. 외계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지구도 고향별도 모두 위험해진다. 다행히 외양의 문제나 언어적 장벽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 두가지를 해결하고 지구에 무사히 안착. 그렇게 눈부시진 않지만 무리없는 “지구인”으로서의 삶을 몇십년동안 영위해왔다.
그런데 어느 날 아주 갑자기 혹성에서 지령이 내려온다. “모일 모시에 혹성으로 복귀할 것” 시계를 보니 주어진 시간은 하루뿐이다. 내가 지구에서 살아온 몇십년의 삶. 이제 사실상 지구인처럼 살아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하루동안 다 정리해야 한다면 우리는 어떤 느낌일까?
이런 가정은 정말 SF스러운 가정이지만 저기서 “안드로메다 은하”를 북한”으로 지구를 “남한”으로 외계인을 “간첩”으로 고친다면 꽤 그럴싸한 한국문학이 탄생한다. 김영하의 <빛의 제국>은 바로 그런 내용이다. 반평생을 고정간첩으로, 그렇지만 북한 내 권력투쟁 과정에서 담당자가 사라져 정작 북에서도 신경을 끊은 채로 살아온 김기영이라는 고정간첩이 돌아오라는 북의 지령을 받고서 자신의 하루를 정리하는 이야기이다.
남북소재라는 말에서 우리는 흔히 최인훈의 “광장”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한국의 문화에서 이념갈등을 다루는 방법은 어떠한 이념도 부정한 채 인간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식으로 흘러간 경우가 많다. 이념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긍정적이다-대부분의 남북영화들을 생각해보고 교과서에서 배웠던 <학마을 이야기>의 인물상을 생각해보자.
그러나 <빛의 제국>이 다루고자 하는 점은 최인훈과 김영하의 활동시대 간격만큼이나 넓다. 김영하의 작품에서 남북이란 소재는 우리가 사는 이 남한이라는 공간을 돌아보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의 대부분은 기영의 끊임없는 관찰로서 채워진다. 그리고 그것은 거창한 이데올로기라던가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인”의 수준이다. 그의 지난한 적응기 자체가 이미 남한 사회에 대한 꽤 흥미로운 보고서가 되어 있는 것이다. 거기다 <광장>에서 이명준을 죽음에 이르게 한 체제갈등은 기영에게 그렇게 심각하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남한 사회를 이방인으로서 관조하지만 그와 동시에 삶 자체도 하나의 “클리셰”로서 자리잡는 기묘한 분열상태로서 살아간다.
따라서 <빛의 제국>을 이야기 할때 <광장>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명준이 공산과 자본 두가지 중 어느것도 택하지 않고 실존의 소멸을 통해 해방을 얻었다면, 기영은 그것이 자신의 의도건 아니건 분열증을 견디며 살아왔고, 살아야 하게 된다. 소설의 제목 <빛의 제국>이 된 르네 마그리트의 원작이 빛과 어둠의 모순 상태를 나타내는 것임을 생각해본다면, 소설의 제목은 실로 적절하다.
-2-
그런데, 기영의 분열증적 상태는 이 사회에서는 사실 한번이라도 꿈을 꿔본 자에게는 누구한테나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본디 온 곳, 혹은 내가 원하는 곳에 대한 자아와 내가 살아가야만 하는 자아간의 갈등. <빛의 제국>이 정말 다루고자 했던 주제는 남북간첩의 문제나 운동권 후일담이 아니라 이런 자아의 분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다.
우리에겐 이명준처럼 두가지를 거부하고 소멸해버릴 용기도 의지도 없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긍정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불안한 실존의 상황은 숙명적이다. 그리고 결국엔 “이념과 이상”보다는 “살아야 하는 자아-입”이 승리한다.(사실 기영의 경우 그 입 조차 하나의 조작 대상이지만) 그렇기에 기영은 남한에 적응 할 수 있었고 마리는 다시는 운동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수 있었다. 사실 이 징조는 기영의 아버지가 기영에게 “주체사상의 허무함”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부터 드러나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이 주체적이라 한 들. 홍수가 나고 배가 고프면 어찌할 수 없다는 그 말.
그러나 이것은 “먹고 사는 걱정을 해야 하는 어른들만의 세계”일까? 세개의 층위 중 가장 덜 분열된 자아를 지닌 현미조차도 친구와의 관계에서 분열의 징후를 보이고 이후 이 아이 또한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강박과 살아야 하는 자아와의 갈등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
정작 문제는 입의 승리 이후에 온다. 승리 이후에도 강박적 자아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강박적 자아를 어떻게 해소시켜야 하는가? 이 “빛의 제국”을 극복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김훈처럼 입을 전면적으로 긍정하여 “수치 또한 어른스러운 것이다”라는 새로운 강박으로 돌아가는 길만이 있는 것인가. 적어도 김영하의 결론은 어느 한쪽도 긍정하진 않는 것 같다.
기영의 마지막 눈물이 미묘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남한에서의 삶이 보존되는 것에 대한 기쁨인지, 북한으로 못 돌아가게 된 아쉬움인지, 남한에서의 삶 자체도 허구임을 깨달았기 때문인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분열된 자아로서 온전한 삶은 가능 한 것일까. 구판 표지에 새겨졌던 폴 발레리의 유명한 문구인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말은 소설의 성격을 가장 잘 대변하면서 우리에게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를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