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2] 테이큰 쉘터
지난 여름부터 영화를 보며 어렴풋이 느낀 거지만. 파국을 다루는 영화가 점점 많아지는 느낌이다. 내가 보지 못한 수많은 영화들 사이에 종말을 다룬 영화들이 좀 많겠냐만은, 멀티플렉스에 걸리는 영화만 보는 내가 그렇게 느낀다면 증가 추세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런 영화들을 보고 있자면 생각보다 "우리 망했어요"라는 정서가 그닥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진다는 점과. 파국 이후 없이 파국까지만 이야기하는 시대인가 하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고광일의 강력 추천으로 보게 된 <테이크 쉘터>도 그런 맥락에 있는 영화다.
일단 영화에서 가장 먼저 다가오는 부분은 공공복지가 엉망일 경우 개인이 위험대비에 있어서 얼마나 큰 비용을 치루느냐 하는 문제다. 곧 폭풍우가 올거라는 자신의 망상에 주인공이 대처하는 모습들은 꿈과 편집증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렇기에 매우 비현실적이지만 그 양상과 묘사,결과들은 매우 현실적이다.
주인공 가족의 붕괴 과정은 부실한 건강보험 체계 , 공공대피소의 부재, 해고 후 생계수단의 부재 등으로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남편의 폭풍에 대한 망상은 조현증(정신분열증) 가족 병력에 기인하는 것이긴 하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위기상황에 찾을 수 있는 공공성의 부재에서 나온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문득 마가릿 대처의 '더이상 사회는 없다'라는 명언이 생각난다. 이 말을 증명이나 하듯이 요즘 사회는 위험에 대한 개개인의 준비와 책임을 어느때보다도 강조한다. 반면에 사회는 보다 근본적인 위험 대비를 이야기하고 준비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정신병자 취급을 한다. 비근한 예로 탈핵이니 탈 자본주의니 하는 대안을 말하는 이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생각해보자. 과도한 걱정, 망상, 대안없는 준비 등의 꼬리표가 그들에게 따라다닌다.
그렇다고 해서 위기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그 이후에 무엇이 있는가?'라고 물었을때 뚜렷한 상을 가진 것은 아니다. 묘사하기 힘든 파국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경우만이 계속 늘고 있다. 실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종말이나 파국은 8~90년대 종말론자들에게 유행하던 휴거나 공포의 대왕처럼 명료한게 아니라 보다 현실적이고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할 수 밖에 없다는 걸 반증하는 것일까? 현황이 복잡할 수록 끝도 복잡할 수밖에.
이렇게 파국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예언자'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밖에 없다. 종말을 예언하는 이들은 항상 결과적으로만 판단된다. 종말이 도래하지 않으면 예언자는 치료와 비난의 대상이지만, 종말이 도래하는 순간 예언자는 선지자로 승격된다.
이를 코믹하게 푼게 아마 <에반 올마이티>같은 영화일 것이다. 영화에서 에반은 신의 계시를 받고 잘나가는 국회의원직도 때려친채 노아의 방주를 건설해 모두를 구한다. 하지만 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예언자가 어떤 취급을 받고 어떤 고통을 겪는지를 보고 싶다면, <테이크 쉘터>를 보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물론 우리 모두는 '아 이젠 우리 다 망했다' 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다. 시대는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위기는 계속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어쩌면 이미 망했는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서 새떼들이 끊임없이 이상한 모양으로 날아가듯 징후들은 관심있는 이들에게만 보인다.
때문에 대다수가 믿지 않고 외면하는 파국을 미친놈 취급 받아가며 혼자서 준비하는 남편의 모습은 여러 종교 신화들에 나오는 예언자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에서는 다행히도 그의 미친 행각의 타당성이 마지막에 입증된다.
그렇다면 <테이크 쉘터>라는 이 기묘한 영화는 다음과 같이 읽힌다. 세상의 실제 많은 부분 이 과학적,합리적으로 이루어졌더라도, 말기의 증세 혹은 파국에 대한 대비는 결국 종교적인 모양새나 신념으로만 묘사되고,준비될 수 밖에 없다는 것. 실제로도 우리가 지금 체제 '다음'을 이야기하고. 비웃음 속에 무엇인가를 준비하는 것은 작건 크건 어떤 종교적 신념 없이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