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공연

[0104] 변호인 _ 현재의 부박함.

leedong 2014. 2. 2. 22:09




1. 여자친구와 심야영화로 변호인을 봤다. 많은 이들이 말하듯이 '변호인'은 노무현과 상관없이 재밌고 감동적인 영화다. 이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이야기 자체가 주는 힘이 있기에 일베라고 해서 이 영화를 보지 않고, 노무현 지지자라고 해서 이 영화를 무조건 극찬하도록 내버려두기 아깝다. 작품이 호소하는 감정이 보편적인데다, 이야기의 구조 자체가 워낙 극적인 탓이다.

 하지만 논쟁적 인물의 삶을 다루는 영화이기에 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는 극과 극이다. 이를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1) 노무현에 대한 증오로 영화를 비판하는 입장. 
2) 노빠라서 무조건 극찬하는 입장. 
3) 그저 영화로서만 변호인을 보고자 하는 입장. 

 1과 2가 일베 혹은 친노의 입장이라면 3은 그런 양극단에 서지 않고 영화를 영화 자체로서 보려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 해당하는 태도일 것이다. 1과 2가 비판의 대상이 될만한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3의 태도로 영화를 보고자 해도영화에 '중간계'의 세계관이 아닌 현재 한국의 세계관과 인식이 담겨있기에, 영화를 보는 내내 비집고 들어오는 불편한 부분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그 불편함을 '80년대와 현재가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이라고 한다. 또 대부분의 인식이 그런 것 같다. 그러나 대한민국 수립 이후 계속해서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가 '변호인'을 통해서도 나타나는데 불편함의 진실이 있다. 즉, '빨갱이는 인간으로서 보호받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그것이다.

나에게는 이것이 이전에 '광해'를 보면서 느꼈던 불편함과 비슷하다. 광해가 매우 잘 만들어진 영화인것과 별개로 현실의 한계(민중을 위한 '군주'를 바라는 봉건적 사고)를 계속 마치 가능성(우리편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인 것처럼 이야기했고, 그것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을 보면서 느꼈던 불편함 말이다.


2.'변호인'은 노무현을 광해보다 노골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우리편 군주'와 같은 단순한 태도로 노무현을 포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광해와 달리 '변호인'이 은연중에 드러내보이는 현실의 한계는 국가보안법과 소위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인식에 있다.

 예전에 자유인문캠프에서 수강한 계원예대 서동진 교수의 강연 중 민주화 운동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서동진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민주화 이후 군사정권 시대의 민주화 운동 기념 사업이란 다음과 같다-혁명가들이 가지고 있던 다양한 세계관,활동,이상,투쟁들을 거세하는 것. 그저 직선제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세계로 지난 세월의 '운동'들을 짜맞추는 것. 그들을 그저 공권력의 선량한 피해자로 만드는 것. 그리하여 그 결과 지난 격동의 세월에 '피해자'는 있지만 '혁명가'는 없게 되었다는 게 그의 분석이었다. '변호인'이 보여주는 세계관은 이 내용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게 아닐까?

 영화는 계속해서 피해자들로부터 '공산주의'라는 인식을 떼어버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송우석의 모습을 그린다. 그들은 '빨갱이'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그저 순백의 '피해자'일뿐이고 국보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이하게도 영화 내내 '국보법'에 대한 근본적 물음은 딱 한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무하마드 알리를 김일성이 좋아하면 알리를 응원한 나는 빨갱이가 되는 겁니까?'라는 고무찬양죄에 대한 물음이 그것이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영화 내내 '국보법'에 대한 물음은 항상 아슬아슬하게 비껴간다. 아니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면 안돼? 빨갱이면 안돼? 레닌의 책을 읽으면 안돼? 라는 물음은 이 영화에서 설 자리가 없다.

 피해자는 착해야만 하고 아무런 의도도 없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변호인'이 그들을 구해낼 수 있으니까. 실제로 부림사건의 당사자들이 대한민국 사회에 대한 나름의 변혁 모델을 탐구하고 실행하려 했던 이들이라는 점은 이 영화 속에서 말끔히 사라져 있다. 마치 '남영동'에서 김근태의 사상이 소거된 것처럼 말이다. 노무현의 정의로움과 부당한 국가만이 남아서 서로 소리지르고 울며 난리를 피운다. 그런 인식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도 우린 그저 억울한 이들일 뿐이고, 우리의 세계관은 80년에 성취된 직선제 민주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



3.물론 억울한 이들에 대한 국가의 폭력은 항상 지양되어야 하는 일이다. 또 실제로 그 시대에 공산주의자에 대한 전향적 인식을 기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 만들어진 영화가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람들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소위 '진보적 인식'이라는 것,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시민'의 인식이라는 것이 결국 우리편 군주를 원하거나(광해) 공산주의자는 안돼(변호인) 정도라는 이야기로 나는 느껴진다. 그리고 그 시민들은 지극히 '선량'하고 '정치적 의도'따위는 없어야 하니, 그들을 군주께서 지켜줘야 한다는 의지도 느껴진다면 너무 과도한 인식일까.

 영화는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1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젊은날의 노무현의 입을 통해 이야기하지만 그 국민이 가져야 할 자유인 헌법 제 19조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와 '국민이란 그럼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결정적 순간마다 자꾸 피해간다. 그 회피가 너무 노골적이라 나는 '그렇다면 저들이 정말 혁명을 준비했던 이들이라면 어떻게 저들을 대해야 했단 말인가?'라는 의문을 버릴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이 서동진 교수의 말처럼 이제는 그저 '순백의 피해자'와 '직선제'말고는 뭐가 남았는지도 다시 돌아볼 수 밖에 없게 된다.

4.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현실의 지점은. '박근혜는 독재정권이다'라는 뻘소리가 아니라 이석기와 RO를 대하는 소위 '시민'들의 태도에 있을 것이다. 87년 이후 시대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지점을 돌아왔다. 물론 세계가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진보를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81년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다음을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노무현은 계속해서 되풀이되어 소환된다.

 나는 이 영화가 '공산주의자'를 옹호하는 영화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런 영화는 충분히 많이 있다. 이 영화가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변호인'이 나타내는 세계관과 그에 대한 현실에서의 열광이 만나는 순간,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한 세계라는 것이 하다못해 '사회적 민주주의'도 아니고 결국 '우리편 대통령'을 뽑아 저 '보수주의자'들을 물리치는 세상밖에는 없는 것인가 하는 회의. 이젠 현재에 적용 불가능하고, 적용 되서도 안되는 80년의 일들을 계속 호출해 내면서 용도폐기된 87년의 세계를 지금 와서 다시 만들어 내자는 제한된 상상력. 이 모든것이 '변호인'이 현재의 부박함을 반증하는 것 만큼이나 그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