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1] 일이란.
부모님과, 혹은 부모님 세대와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 분들이 자주 하시는 말이 있다. '어떻게 모든 걸 만족할 수 있니'라는 말이다. 이 문장에서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일의 의미는 생계수단이다. (이것을 1번이라고 하자) 여기에 맞서 나를 포함한 많은 젊은이들이 '이건 의미가 없어요' 라고 말하며 '이걸 하고 싶어요'라고 얘기할때 일은 일은 자아실현의 수단이라는 관념이다(이 일은 2번이라고 하자.)
물론 자아실현 이라는 말은 항상 애매하게 쓰이고 있다. 대체로 이 말이 쓰이는 맥락을 생각해보면 성취감,눈에 보이는 업적의 달성,좋아하는 느낌/행동의 직접적인 실현,동료로부터의 인정 등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다. 여기서 좀 더 생각해보면, 2번에서 1번이 크게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내가 사회에서 임노동자로서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는 자립감을 생각해보면 이 느낌 또한 충분히 자아실현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하지만 요즘 우리가 '일'을 말할때, 자아실현에서 생계수단의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우리가 공무원이라는 직업이나 아르바이트들을 보통 생각할때 그 직업이 '자아실현을 한다'라고 말하지는 않는 것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
생계수단 의미를 제외한 2번의 일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본다면 마치 일에 대한 관념이 드디어 생계의 도구에서 자아의 실현으로 제자리를 찾은 것 같지만, 이 효과라는게 꽤나 타격이 크다. 나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우리 세대가 일은 1번이 아니라 2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양자간에서 발생하는 괴리감으로 인해 이직하고, 사직하고, 많은 시도들을 한다. 멘토들은 2번이 진짜 살아남고, 행복해지는 방법이라고 후배들한테 수없이 사기를 치는 시대이다.
사실 1번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던 시대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성장의 시기에는 조직과 자아가 함께 움직일 여지가 많다. 현업에서 과장-부장을 달고 있는 분들의 경험담 중 가장 인상적인 것들은 그런 종류의 이야기들이다. 초창기에 스타팅 멤버로 시작하여 회사와 내가 같이 크는 재미가 컸다는 점. 거기서 만들어진 자신감으로 10년이 넘게 일할수 있었다는 점 등등. 이런 경험담들 속에는 사실 '나는 그 일이 너무 좋았어'라는 고백은 존재하지 않는다. 뭔가를 벌리고, 뭔가를 같이 키워간다는 동적인 측면이 더 중요하다. 그게 영업일수도 있고, 마케팅일수도, 사업관리일수도 있다. 그러나 '광고가 너무 좋아' 라던가 '영화가 너무 좋아'는 아닌 것이다.같은 의미에서 과연 부모님 세대가 자아실현으로서의 일을 무시했는가? 라고 생각해보면 나는 그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대에는 어쩌면 프로페셔널한 전문가가 되는 것이나, 미적인 노동을 행하는 것 보다는 아마 자립하여 돈을 벌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코스 (20대 취업 /30대 전세/ 40대 내 집 마련)를 성취하는 것 또한 중요한 자아실현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고, 조직과 자아가 같이성장할일은 많이 없어졌다. 생계수단만으로도 자아실현이 가능했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조직과 개인은 같이 클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조직에 삶을 걸 수 있는 시대도 사라졌다. 생계수단이 생계수단으로 언제까지 기능할지 모르는 시대에는 그 이상의 철학이 없으면 고용주와 노동자 모두 임노동의 공급과 수요를 지속하기 어렵다는 가정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일은 즐거워야 하고, 내 생활을 사로잡아야 하고, 미적이어야 한다. 때맞춰서 모든 이들이 예술을 할 수 있다는 말도 안되는 철학이 모두를 사로잡고, 모두가 마치 일을 자아실현의 도구로서 활용할 수 있는 시대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을 성취하는 경우는 참으로 드물다.
다루는 것이 콘텐츠이건, 실물이건 간에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여 진행되는 임노동의 특성과 조직 특유의 관료제적인 성격들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00가 너무 좋아'라고 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별거 아닌 결과물들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 사람들이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기란 어렵다. 그리고 또 이러한 고민들이 쌓인 더미 맞은편에는 이러한 생각들 조차 사치로 여겨지는 시장이 존재한다. 심지어 생계수단으로서의 기능 조차 하기 힘든 불안정한 일들이 안으로는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밖으로는 그 일을 하지 않는 이들의 공포심을 조장하며 유지되는 형국인 것이다. (예를 들면, 그래. 나는 비정규직이 아니니까 그래도 괜찮아. 힘을 내자. 따위의) 그러나 어느쪽이 되었건 '자아실현으로서의 일'에 대한 갈망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만다.
그렇다면 아마 어쩔수 없이 조직에 속해 임노동을 계속하고자 하는 이들의 선택지는 두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전 세대의 선배들처럼 일의 생계수단이라는 측면 또한 자아실현의 중요 사항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자아를 현실에 맞게 축소하는 법. 두번째는 불가능한 일임을 알면서도 행복한 워커홀릭이라는 이상향을 향해 계속 괴로워하고 한탄하는 것.
<미생>이라는 만화가 일에 대해 우리의 시선을 바꿔줬다고 찬탄할때, 그것은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일을 찾도록 해-라는 낭만적 이야기를 해서가 아니라. 1번(생계)가 2번(자아실현)의 일부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줬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러나 전자라고 해서 후자보다 쉬운 것은 아니다. 생계수단이 자아의 실현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일들이 안정성을 가져야 하고, 지속성을 가져야 한다. 우리 삶에 일정하게 공유되는 패턴이 존재해서 그 패턴을 하나하나 성취해 가는 곳에서 자아실현이 가능해야만 한다. 우리가 생계수단으로서의 일에 만족하고자 해도, 그 일이 언제까지 내 생계를 책임져 줄 수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생계수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즐거운 워커홀릭'의 흉내를 낼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산다. 자소서와 면접을 경험해본 이들은 모두 다 알 것이다. 얼마나 우리가 일을 얻기 위해 애정을 흉내내야 하는가를.
우리가 일에 대해 고민하는 것 중 대다수는 그것이 부당한 조건 아래 이루어지기 때문인 경우이고, 이것은 모든 이들이 함께 해결해나가야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문득 내 스스로를 생각하며 느끼는 것은,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비대해진 자아로 인한 문제들 또한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요즘 젊은 것들은 만족을 몰라'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포기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겪으며 자랐다. 포기했을 경우 얻어지는 대가는 이전 세대보다도 적다. 그 생계수단들 조차 우리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도, 길지도 않다. 그런 시대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