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옥희의 영화
홍상수의 영화를 처음 봤던 기억은 김상경과 예지원이 나왔던 “생활의 발견”이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그저 유명 여배우의 노출씬을 보겠다는 일념 아래 친구한테 (그 친구는 예지원의 광팬이었다) 영화 씨디를 빌려 대부분의 장면을 스킵하고 예지원과 김상경의 섹스장면만 눈이 빠지게 봤더란다. 지금 되새겨 봤을 때 그 짧은 짜릿함 이후에 찾아오는 건 대체 내가 이거 뭐하고 있나..싶은 씁쓸함과 헛웃음이었는데. 이런 헛헛함이 나에게 있어서 홍상수 감독과의 첫 대면이었다. 물론 당시는 그 영화의 감독이 홍상수 인지도 몰랐다.
그 씁쓸함은 좀 나이가 들고, 홍상수 감독을 인지하고 그의 작품을 보기 시작하면서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오! 수정>에서 느꼈던 우리가 얼마나 착각을 하면서 살아가는가에 대한 씁쓸함.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하하하>에서 느꼈던 우리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혹은 가치들이 술과 성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에 대한 씁쓸함. 뽀뽀하고 싶다. 자고 싶다. 라는 일상적이지만 드러낼 수 없는 욕구들을 끄집어 내며 정말 집요할 정도로 이어지는 찌질한 묘사들을 보고 있자면 신나게 웃지만 속으로는 내 얘기란 생각에 마냥 웃을수만은 없게 만드는 힘이 존재한다. 나도 저 지식인들처럼 무슨 소리인지도 모를 헛소리를 거창한 것처럼 떠들다가 뒤에 가서는 어느 카페에 앉아 몸매 잘 빠진 여자를 보며 하앍대고 있겠지. 내가 고등학교때 예지원의 알몸을 보며 하앍거리다가 뒤늦게 에이 병신같아..라고 하며 스스로를 자책했을 때 느끼던 그 헛헛함이랑 별 다를바가 없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게 바로 홍상수의 영화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나는 고해성사를 하는 기분에 빠지곤 한다. 특히나 이런 기분은 극장 가서 홍상수 작품을 볼 때 더해지는데 특정 장면에서 나만 한숨쉬고 웃는게 아니라는 점에서 나 혼자 찌질하게 사는게 아니구나! 라는 위안을 받곤 했다.
< 옥희의 영화>도 홍상수의 그런 빈정거림과 관조를 담고 있다. 4연작으로 되어 있는 <옥희의 영화>에서 1부와 2부에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나 <하하하>에서 드러났던 대단한 것들의 찌질함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가 내가 이전에 봤던 홍상수 영화와 조금 다르게 다가온 것은 3부와 4부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구의 말년일지도 모른 <송감독>은 홍상수 작품들 속에서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하며 끝까지 가오를 잡으려고 했던 것에 비해 마지막에 낙지를 토하며, 그만두길 잘했다며 눈 쌓인 길을 걸어간다. 이전의 내가 본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보지 못한 인물의 적극적인 변화를 3부 <폭설 후>에서 느꼈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물론 <폭설 후>에서도 송감독은 “영화를 찍기 위해 강사직을 그만둔다”고 뻥을 치고 여제자는 칭찬하고 남제자는 욕하며, 그들과의 대담에서 하나마나 한-그러나 뭔가 있어보이는-이야기들을 지껄이지만 적어도 그 여제자를 꼬셔서 여관으로 돌진하거나 그만둘까 말까를 계속 번뇌하며 방바닥을 치진 않는다. 체한 낙지를 뱉어내며 웃는 송감독의 모습에서 홍상수 세계에서 보기 드문 초탈한 인간을 본건 나 혼자 만은 아닐 것이다.
또 다른 변화를 본 것은 <옥희의 영화>에서 느껴지는 애잔함이다. 단순히 두 남자와의 같은 공간 다른 시간에서의 연애를 붙여놓은 이 짤막한 영상은, 홍상수 특유의 빈정거림이 쏙 빠진 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잔함을 불러 일으킨다. 이 애잔함은 나에게 있어선 <오! 수정>이후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것인데, 사실 낯선 것만은 아니다. 홍상수 영화를 보고 한참 웃다가 찾아오는 그 헛헛함과 쓸쓸함을 확대시켜놓은 느낌. 그렇게 별 차이도 없는 일상들이 단지 상대나 목적이 바뀐 채 반복된다는 점. 그 사소한 차이를 마치 대단하고 새로운 것처럼 느끼며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사소함에 대한 슬픔. 아차산에 올라오는 문성근을 마주쳤을때의 옥희의 당혹감. 나는 잊지 않았겠지만 상대는 잊었을 것이라고 지레 생각하던 마음들. 같이 본 친구는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희노애락을 느끼며 충실하게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얘기했지만 항상 “쿨한 척”노력하려는 나에게는 그런 행동들이 슬프게만 느껴진다. 이 슬픔은 격정적이진 않지만 묵직하고 오래 남는다. 동떨어진 슬픔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일상의 와중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슬픔이기 때문이다.
< 옥희의 영화>는 그의 작품이 끊임없이 취하는 빈정거림에서는 한발짝 물러났고 관조와 애잔함은 더 해졌다. 우리의 일상이 마냥 찌질하거나 촌스럽지만은 않기에, 홍상수의 영화는 더더욱 부정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언제나 그랬지만 그의 영화를 부정하는 것은 곧 나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종종 갑작스러운 클로즈업을 통해 이것이 “영화다”임을 상기시켜주어도 홍상수의 영화는 극장을 나가도 끝나지 않고 사소하고 찌질하지만 때론 색다른 우리 삶의 반영으로써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