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황새바위 순교탑과 칼레의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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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일선물로 받은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에서 내 눈을 가장 사로잡았던 건축물인 황새바위 순교성지 순교탑의 사진. 순교의 의미를 건축적으로 풀어서 보여주는 장치라고 한다. 좁은 문 사이로 걸어서 올라가기 불가능한 계단을 배치하고. 그 끝에 십자가를 놓는 식으로 구성된 기념탑. 이것이 무신론자인 나한테 울림을 주는건 아마 순교라는 것이 꼭 종교의 문제만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꿈을 현실에 불러오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죽은 사람들은 다 순교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탑을 사진으로나마 보고 있자니 여러가지 작품들이 떠올랐는데, 대표적으로는 님 웨일즈의 <아리랑>과 조지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그리고 <칼레의 시민들>과 한번도 읽어본 적 없으나 딱 일부분만 숱하게 줏어들어서 알고있는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가 생각났다. 물론 같이 따라오는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가 떠오른건 필연적.
건축물은 그저 나에게 지금까지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건축물 하나에서 이렇게 많은 것을 끌어낼수 있다니. 아니 그 이전에 이미 건축사가 가지고 있는 깊은 통찰력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글을 쓰도록 만든다고 봐야 할 것이다.
" 클레(P. Klee)가 그린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라고 불리우는 그림이 하나 있다. 이 그림의 천사는, 마치 그가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떨어지려고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묘사되어 있다. 그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그의 입은 열려 있으며 또 그의 날개는 펼쳐져 있다.역 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쉬임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을 바라보고 있다.천사는, 머물러 있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깨우고, 또 산산히 부서진 것들을 모아서 다시 결합시키고 싶어한다.그러나 천국으로부터는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또 그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그의 날개를 더 이상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지 난번 중대인문캠프때 백승욱 교수님이 벤야민의 저 문구와 파울 클레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바리케이트 끝에서-라는 주제로 강의를 마무리했었던 기억이 난다. 패자가 승자를 궁휼히 여길수 있는 자세. 분노에 먹히지 않는 자세. 바리케이트 끝에 벼랑 끝에 서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나는데. 물론 그게 얼마나 현실적으로 유의미한가를 떠나서 그런 상징들이 주는 저릿함이 있다. 그리고 아마 그 저릿함을 가장 극대화 시킨 행위 중 하나가 순교라고 할 수 있다면, 파울 클레의 그림과 황새바위 순교탑, <아리랑>에 수록된 김산의 삶, 아이티 흑인 노예들이 불렀던 <라 마르세이즈>에 대한 이야기와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그리고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이 주는 감정은 아마 다른 것은 아닐거라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이 모두는 "패배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기지 못해 세상을 만들지 못했고 그래서 죽거나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그게 사회주의 국가이건, 하나님 나라이건, 조선의 독립이건. 대다수를 행복하게 해줄거라 믿었던 이상향이고 실현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같을 것이다. 또한 승자를 궁휼히 여기거나 졌다고 굴복하지 않는 패배자들이기도 하고.
건 축을 포함하여-예술이 위대하다는 것은 아마 이런 부분일 것이다. 우리에게 내가 쓰는 이런 구차한 긴 글 없이도 단 한방으로서 울림을 주는 그런 힘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긴 글을 읽어낼수 있는 배경 하에서 더 증폭되는 것이기도 하다.
로 댕의 작품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땅에서 솟아 나온듯 한 묵직함으로 사람을 멍하게 하지만 칼레의 시민들이 왜 저런 모습을 해야 했는지. 아니 로뎅이 왜 저런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고 있다면 그 감동은 배가 될 것이다. 그 밖에 내가 알았던 단편적인 지식들-스페인 내전이니 벤야민이니 김산이니-하는 것들을 묶어내는 어느 순간은 항상 잘 짜여진 글보다는 예술을 볼 때이다. 물론 문학과 그밖의 수많은 글들은 나에게 저 작품들을 볼 때만큼의 깊은 감동을 주었지만 한방에 다가오는 직관적인 부분에서 조각이나 회화,건축을 따라오기는 어렵다. 오늘만 하더라도 내가 알고 있던 이 모든 것들이 황새바위 순교탑이라는 하나의 작품아래 같은 감정으로 묶이고 나한테 수없이 많은 생각을 가능하게 했다. 그치만 그 순간은 역시 글을 읽지 않는다면 오지 않는다. 이성이 열어줄 수 없는 부분을 감성이 열어주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이성이 밀어올려줄 때에 가능한 경지가 아닐까. 감성이 위대하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이성이 필요한 이 아이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