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로운 삶을 위하여 - 이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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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전 동유럽을 여행할 때 가장 낯설었던 건 식사였다. 주 메뉴 전 내놓은 와인, 커피, 빵 세 가지에 나는 불편했다. 며칠 동안 그 맛을 알 수 없는 와인에 혀끝만 적셨다 뗐다. 커피는 본래 먹지 않던 것이기도 했지만 한약을 진하게 달인 듯 찐득한 검은 액체의 질감 때문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누렇게 빛바랜 색깔로 놓여 있던 빵. 식빵이나 단팥빵 정도 먹어본 내게 그 빵은 정말 이상했다. 맛 제거 수술을 받은 빵이라고 해야 할까? 철저한 맛의 부재! 충격이었다. 이걸 먹으라고…?. 그런데 여행이 끝날 때쯤 변화가 왔다. 와인은 텁텁한 맛에 조금 익숙해져 몇 모금 마실 수 있었다. 상상할 수 없이 심심했던 빵도 씹는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아무런 맛이 없었지만, 그저 심심하기에 자꾸 씹게 되었다.
사실 어느 문화권에서나 주식은 심심하다. 빵뿐 아니라 쌀밥, 감자, 옥수수가 그렇다. 매일, 평생 먹어도 물리지 않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심심함이란 적당히 간을 하면 원하는 맛을 낼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심심하다는 건 맛의 부재에 대한 서술이라기보다 맛의 풍부함을 준비하고 있다는 신호로 봐야 한다. 그건 우리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심심해야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해 낼 수 있다. 심심해야 무언가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심심함은 인생의 맛을 위해 비워 놓은 자리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짜고 맵고 시고 달고 쓰기만 하다. 심심한 때가 언제였는지 아득하다. 지난해 누적된 피로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또 바빠질 한 해를 헤쳐 나가려면 더 열심히 더 많이 일하자고 새해 결심을 한다. 이미 지친 몸과 마음을 채찍질하며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보자고 이를 악문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해. 하고 싶은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하는 것을 위해.
이런 사회에서 심심해하면 지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저녁마다 심심하다면? 낙오자 취급받는다. 그렇게 찍히지 않으려면 필사적으로 약속을 해야 한다. 저녁마다 누구든 만나서 죽어라 술 마시고 대화인지 고함인지 욕설인지를 하다가 토하고 젖은 화장지처럼 늘어진 채 귀가해 쓰러져 자다 충혈된 눈으로 출근해야 한다. 저녁 술자리는 단골집에서 친구와 인생·예술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다. 물벼락 맞은 개가 몸을 털 듯 그날 자기 몸에 축적된 독소를 빼내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이들에게 이런 풍경은 낯설 것이다. “나는 아침을 먹었다.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무작정 널따란 백지 같은 오늘이라는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무슨 기사(記事)라도 좋으니 강요한다. 나는 무엇이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연구해야 한다. …마당에서 밥을 먹으면 머리 위에 그 무수한 별들이 야단이다. 저것은 또 어쩌자는 것인가. 내게는 별이 천문학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시상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향기도 촉감도 없는 절대 권태의 도달할 수 없는 영원한 피안이다. 별조차 이렇게 싱겁다.”(이상, <권태>)
E P 톰슨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특정 고용주에게 속박된 채 다른 돈 버는 행위를 일체 배제하는 직업은 산업혁명 이후 등장한 것이라고 했다. 엥겔스도 산업혁명 전 직조공은 원하는 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만 소득을 올리며 살았다고 썼다. 이제 와서 산업혁명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일하는 노예로 늙어가는 게 행복하지 않다면 계속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
죽어라 일을 해도 삶이 나아지지 않고 있다면, 이 사회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일하는 자의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 항상 바쁜 이들, 특히 가장 열심히 일하지만 여전히 가난한 이들은 그 문제를 생각할 틈이 없다. 이게 바로 지금의 생산체제를 유지하는 핵심이다. 그들은 무조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이 생산체제의 기획자들이 만들어낸 노동윤리를 따르고 있다. ‘게으르다, 놀다, 쉬다, 한가하다, 심심하다’는 그들에게 생산체제를 위협하는 부도덕한 행태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지쳤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자 가장 지적인 일을 할 때가 됐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느림, 휴식, 여가, 파업, 권태. 사람들이 심심해질수록 폭주 기관차의 엔진은 식는다. 심심한 사람들은 세상을 찬찬히 들여다볼 것이고 세상에 휩쓸려가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삶을 꿈꾸고 다른 사회를 준비할 것이다. 권태는 21세기의 혁명이다.
부디 올해는 권태로운 해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