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빵과 장미
켄 로치의 영화는 스무스하게 잘 흘러가는 것 같으면서도 도중에 막막한 질문들을 하나씩 던진다. 빵과 장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영화의 주된 골간은 청소노동자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조직해서 노동권을 찾기 위한 투쟁에서 승리하는가?에 대한 낭만적인 이야기지만. 사실 더 중요한건 극 후반에 언니 로사가 동생 마야에게 던지는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마야의 행동이 아닐까 싶다.
노조 동지들을 배신하고 관리자가 되기로 한 행동을 비난하는 마야에게 로사는 자신이 멕시코에 있는 마야와 엄마에게 생활비를 보내기 위해서,그리고 직장에 마야를 취직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성노동을 해왔다고 이야기하며 "니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배신자라 말할 수 있냐. 나는 내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것"이라 말한다. 그 앞에서 세상 누가 로사를 탓할 수 있는가?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것이 언니의 일방적인 희생임을 알고 나서 마야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몇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저 언니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노조활동을 포기하고 얌전히 살아갈 수도 있었고. 아니면 격렬히 언니를 반박하고 노조에 전념할 수도 있었다. 영화에서 마야가 어떤 고민의 과정을 겪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치만 그녀는 언니 앞에서 펑펑 울었어도 끝까지 노조운동을 하고, 종국에는 승리를 목격한다. 물론 자신이 했던 어떠한 일 때문에 추방당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꿋꿋이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킨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속박하는' 세상인 자본주의 하에서 사실 우리가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들이 그리 많지 않다. 켄로치는 노조운동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그 노조운동이라는 것 조차도 어떠한 종류의 불합리하고 처절한 희생을 기반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넌지시 이야기한다. 물론 그것이 노조원들의 탓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엄연한 사실을 직시했을때, 낭만의 세계를 벗어나 현실로 돌아올 때 우리는 어떻게 버텨야 하며 어떻게 자신의 신념을 지켜야 할까? 마야의 고민의 과정은 그려내지 않았다기 보다는 그려낼 수 없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거기에 대해 누가 묘사할 수 있었을까. 낭만이 현실로 돌아와야 할때. 장미는 결코 빵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될 때에도 당신은 그렇게 소리높여 외치던 자신의 세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가. 유지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빵과 장미>에서 제기된 질문이자, 누락된 장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