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시절/책

[2009] 시뮬라시옹

leedong 2012. 4. 29. 14:55

1.허세남 허세녀


 한동안 인터넷에서의 화제가 ‘허세’였던 적이 있다. 유명인에서는 최민수,장근석에서부터 일반인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허세 사진까지 한동안 큰 화제였던 적이 있는데, 장근석의 화제의 발언 “뉴욕 해럴드 트리뷴!”과 한동안 패러디가 쏟아졌던 어떤 싸이월드 사용자의 “눈물흘릴때 찍는 사진”의 공통점은 담백하게 받아들이기엔 과도한 자기표현에 기반한다.

 

  그렇지만 그 자신의 실제 모습과는 상관없이 그들의 모습은 그들이 만든 ‘이미지’로써 대변되게 되었는데, 장근석은 허세를 부리는 20대 초반의 남자로,최민식은 철없이 큰소리만 쳐대는 마초 아저씨로,몇몇 이용자들은 과시에 환장한 허세인들로 모두에 머릿속에 각인되게 된 식이다.

 

 근데, 사실 그들을 직접 만나서 친해져보지 않는 이상 그들이 어떠한 실재를 지니고 있는지는 우리로써는 판단할 길이 없다. 즉. 이미지와 실재가 일치한다는 그 어떠한 보장도 없는데, 이미지가 실재를 압도하여 대표하는,더 실재로써 존재하는 상황이 수시로 벌어지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이미지들이 아예 실재를 반영하지 않을 확률은 낮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라고 할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우리가 직접 겪어보지 않은 누군가에게 갖는 정보값은 오로지 실재와 무관한지,유관한지조차 알수 없는 이미지로 구성된 것들 뿐이다. 이미지는 실재를 반영한다는 말은 사실 이 경우에 있어서 엄밀히 말해서는 모호하다.


 이게 너무 좀 뜬구름 잡는 소리 같다면 다른 예를 들어보자. 본인이 누군가에게 관심이 생겨서 블로그나 싸이를 찾아 들어간 지극히 일상적인 상황을 가정해보자. 그의 싸이에 올라온 글이 예술에 대한 감상으로 가득하고,BGM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디밴드의 음악으로 채워져 있다면 보통은 그에 대해서 가질수 있는 인상은 “아 이 사람은 꽤 유니크하고 고급스러운 사람이구나.”  “헐리웃 영화나 소녀시대는 싫어할지도 모르겠네”정도가 되겠지만 사실 그는 예술작품 감상은 정말 어쩌다 한번쯤 하고, 언니네 이발관을 좋아하는 것 만큼이나 소녀시대를 좋아하며, 독립영화보다는 트랜스포머를 보며 더 환장할지도 모른다. 헐리웃영화에 대한 평을 쓰는것보다는 핸디캠으로 찍은 독립영화에 대한 평을 쓰는것이 더 보기 좋다고 판단되어 그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즉, 그 자신이 꾸민 이미지와 관련이 아예 없진 않지만,그것과는 완전 다른 요소도 실재로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혹은 극단적으로 정말 아무런 관련이 없을 가능성도 높다.


 정치적으로 누군가가 진보적인 이야기를 써놓은걸 보면 보통은 “아 이사람은 빨갱이구나”하는 정보값을 내게 되지만, 실제로 그는 상당히 보수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일수도 있다.(실제로 그런 경험이 많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조차도 그런 류의 인간에 가까운데,  어찌되었건 이런 일반적 사례들로 비추어 볼때 이 미디어 유비쿼터스의 시대에, 누군가 표현하는 이미지는 그의 실재에 대해서 아무것도 확증해 줄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모습으로써 기능한다.

 

 우리 자신의 모습은 갈수록 우리 자신의 이미지로써 대체되고 구성된다. 누군가에 대한 판단의 준거틀은 만약 인터넷에서 먼저 알게 된 다음 만난 관계라면 먼저 접한 ‘이미지’가 우선하여 ‘실재’를 판단하게 되지 않던가. 메신져랑 말투가 많이 다르시네요. 아 사진보다 잘생기셨네요. 아 키 큰줄 알았는데 등등.



2.우리가 아이팟에 열광하는 이유


 지극히 1차적 이미지인 외관이라 할수 있는 온라인에 올리는 자신의 사진마저 실재의 내 모습과 다를 가능성이 있는 세상이다. 한번이라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 사진이 그 사람의 모습으로 귀착되지 않던가? 온라인 게임에서의 캐릭터 육성은 현실의 계좌를 잡아먹는다. 이미지는 실재에 기반한다고 하는 당연한 상식은 사실 우리의 일상을 넘어서 인식기관이 되어버린 인터넷만 들여다 보아도 이렇게 무너져 내린다. 대인관계만 그런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소비에 관한 이야기로 잠시 화제를 돌려보자.


 왜 사람들은 분명 기능이 더 괜찮고,가격도 싸며 디자인도 다양한 삼성이나 아이리버의 제품보다 왜 그 오랜 시간동안 똑같은 디자인으로 일관하고,가격도 더 비싸며 파일관리도 불편한 애플의 아이팟을 더 많이 선호하는가? 단순히 실재의 기능이라는 측면이나 실용적 측면에서 보자면 애플의 인기는 다소 비현실적이다.

 

 여기에 대해 “애플이 상징하는 그 무엇,혹은 애플의 디자인”이 타사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라는 반론이 가능한데. 사실 상징하는 그 무엇이나 디자인이라는 것은 물적 토대를 갖는 실재라기보다는 허구적인 기호나 이미지이다. 우리가 아이팟을 사서 들을때는 단순히 mp3p만을 사서 듣는것이 아닌 모두가 한번쯤 갖기를 원하는 “쉬크한 스타일”에 대한 선호 또한 중요하지 않던가? 꼭 mp3p만이 아니라,물(밋밋함)보다 17차(아름다움)를 선호하거나,커피는 역시 라떼(뉴요커)라던가 하는 부분들은 사실 그 상품들의 실재 기능과는 무관한, 이미지에 대한 선호가 크게 작용하는 것이 소비의 대다수이다. 실재만을 따져서는 그저 촌스러워질 뿐이다.

 

 보드리야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가 코카콜라를 마실 때 마시는 것은 검은색 탄산음료가 아닌 젊음이라는 기호”이다. 이렇게 소비라는 측면에서도 그 대상이 가진 이미지와 기호가 대상의 실재를 압도한다. 더 이상 진짜 실재가 어떠하냐 라는 질문은 생활에 있어서 의미를 잃는다. 기호와 대상이 전통적으로 가지던 끈끈한 1:1의 주종관계는 사라진다. 허구와 실재를 분리해내는 것 조차 쉽지 않은데 이미지가 허구에 기반하건 실재에 기반하건 간에 이미 현실에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면, 그것이 허구라고 의미가 없다고 하는것은 가장 무의미한 말이 된다. 더 이상 허구와 실재를 구분하게 해주는 둘 사이의 거리감이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발터 벤야민이 말한 복제에 따른 오리지널의 아우라 상실이라는 훌륭한 예시는 이제 예술이 아닌 전 사회적인 영역으로 확대되며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즉 모든 것이 복제면서 오리지널이다.


 보드리야르가 주목한 것은 바로 이 기호가 실재를 잡아먹고 더 실재처럼 작용하는 현대 사회의 모습이며,이런 역전의 경향이 소비의 영역 뿐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본다. 시뮬라크르가 위에서 계속 얘기한 실재를 반영하지 않는,더 나아가 실재와 무관한 허구에 대한 것이라면 시뮬라시옹은 이 ‘허구되기’를 뜻하는 용어이다. 그가 보는 세계는 정치,사회 가릴것 없이 시뮬라크르가 되버린 사회인데, 이러한 시뮬라크르가 단순히 존재하는 실재를 왜곡되게 표현하는 것이라면 아직 실재에 대한 복원의 가능성은 남아있겠지만, 그에게 있어 현대사회의 시뮬라크르란 결국 실재조차 잡아먹어 이제는 “실재란 없다”라는 상황을 감추는 위장물로써의 역할을 한다.


 

3.미디어가 곧 메세지다(x) 미디어가 곧 세계다(o)



 우리가 실재를 그것이 예술이건,인물이건, 어떠한 역사적 사건이건 불확실하고 허구적인 이미지로써밖에 구성할 수밖에 없다면 결국 본질=허구가 된다.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것은 모두가 허구이기에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일장춘몽의 연설이 아니라 존재가 뚜렷해야만 현실에 영향력을 가질수 있다는 생각에 대한 반박이자 실증이다. 허구나 이미지라고 해서 무조건 타파하거나 무시할 대상이 아니라,허구=실재가 되버린 사회에 대한 증언이다.


 근데 이러한 시뮬라크르 되기, 즉 시뮬라시옹의 흐름은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우리가 소리높여 외치는 가치들조차 시뮬라시옹의 시대에는 실재하지 않는다. 복지는 구성원들이 웃고 있는 따뜻한 가정의 모습으로 이미지화 되고 연대는 광화문 거리에서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의 모습과 영상으로써 상징화된다. 정치인의 인기는 이미지의 구성에 따라 좌우된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그 가치의 전부와 실재는 아니고 연출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 다들 알고는 있지만, 그 이미지외의 다른 실재를 우리가 상상하기란 쉽지가 않다. 더군다나 대상에 대해 갈수록 범람하는 정보들은 의미나 소통을 가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꾸며내며 종국에는 그 대상을 무의미(무가치와는 다르다)로까지 몰아낸다. 정보가 많아지니까 의사소통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정보가 의사소통의 이미지를 ‘연출’하면서 소진되어 버리지 않던가? 의미있는 척,대화하는 척.


 더 나아가 사물과 가치를 넘어서서 세계의 사건과 역사들조차 그의 분석에 따르면 더 이상‘실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는 특정 참사에서 일어난 피해자의 고통이라던가 피해 상황까지 일장춘몽류의 허구로써 부정하진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수 있는 대부분의 통로가 이미지의 재생산소인 미디어 뿐이라는 것이고, 사실 우리의 발 앞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닌 이상은 그 모든 사건이 단지 ‘스크린 위의 이미지’로서만 존재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용산 참사는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로써 각인되어 있는가? 80년 5월의 광주가 우리에게 강풀의 29년이나 피해 기록사진이라는 걸러진 이미지 외에 어떤 존재감을 갖는가? 유대인의 홀로코스트는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를 물어본다면 보드리야르에 대한 심리적 반발감을 보이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특정 사건을 우리가 직접 겪었더라도 미디어에 의해 한번 걸러져 보도되지 않고서는 세상의 대부분에게 그것은 “없는”사건이 되어버린다.

 

 주원규의 “열외인종잔혹사”에서 일어났던 하룻 동안의 잔혹극은 분명 실재하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에 보도되지 않음으로써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90년대 초 모래시계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전에 광주에서의 저항의 역사는 거의 잊혀져 있지 않았던가.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이런식이라면 저항의 역사마저 하나의 시뮬라크르로써 존재한다. 이미지화를 통하지 않는 사건이 가능한가? 맥루한이 말한 '미디어가 곧 메세지다' 라는 명구는 보드리야르에 와서 '미디어가 곧 세계 그 자체이다'로써 확장된다.  


 문제는 이렇게 모든 것이 허구화되었다면, 사실 이 세계는 무너져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세계의 유지를 위해서 세계 스스로가 무엇인가가 분명 의미조차 시뮬라크르화하여 재생산해낸다는 것이다. 실재가 실재로써 기능하지 못하게 될 때 즘에는 시스템은 실재가 존재하는 것처럼 만드는 작업을 한다.

 

더군다나 그가 볼때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균열과 불협화음들 조차 이런 목적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그가 반문하는 것은 도덕관념조차 이미지화된 허구로써 대체되었고 복원시킬수 없는,통제의 대상이 되었다면 세계에 대해서 올바른 가치를 내세우며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게 아니냐는 것이다. 도덕적 진보적 가치에 대한 주장조차 세계가 주입하는 허구이기에 대중이 취할수 있는 전략은 세계의 무의미를 인정하고 거기에 과도순응해버리는 방법이 된다. 즉, 우리가 자주 한탄하곤 하는 대중의 무관심은 사실 그가 볼 때는 이 허구적 세계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반항이 된다.

 

 

4.좋은 시뮬라크르 되기


 그렇지만 시뮬라시옹 이론은 결정적인 자기 모순을 내포한다. 시뮬라시옹 이론 자신은 이 세계에 대한 효과적인 분석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시뮬라크르가 된 허구의 세계라면 시뮬라시옹 이론 또한 하나의 시뮬라크르가 아닌가? 그 과도한 의미에서 하나를 더한것쯤에 불구하다면, 그렇다면 이 이론에는 무슨 의미가 존재하는가? 모든 것을 시뮬라크르로 환원 시켜 버린다면 이것 또한 한낱 시뮬라시옹에 불구하게 되고 그저 지적 유희를 곁들인 냉소로 귀결되게 된다. 정작 시뮬라시옹이 얘기하고 싶은 것은 가상 또한 현실이라는 가상에 대한 옹호였지만 지나친 옹호로 인하여 자기 자신조차 무의미한 가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거짓말쟁이의 패러독스라는 고전적 우화가 여기에도 적용된다.


물론 시뮬라시옹이 제시하는 분석의 틀은 매우 유용하다. 더군다나 보드리야르가 저서를 쓴 때보다 지금이 더 일상생활에 대한 기호와 이미지의 지배가 더욱 심화된 상황이다. 실재는 점점 기호와 이미지에 먹힌다. 스타는 가도 스타일은 남고 가치를 판단하게 하는 것이 투입된 노동량도,사용가치도 아닌 이미지라는 것은 점점 더 명확해진다. 명품백의 질과 지마켓의 st백의 질의 차이가 그 가격만큼이라고 누가 말할수 있겠는가. 우리가 받아들이는 사건이 우리가 직접 목격한것이 아닌 한번 걸러진 이미지들 뿐이라는 것을 누가 부정할수 있는가?


 그렇다고 실재의 복권을 주장하기에는 그 실재가 무엇인지조차 애매하다. 도대체 실재란 무엇인가? 인터넷을 하지 않고 있는 나 자신? 소비를 하지 않는 나 자신? 어떤 사건을 모두가 다 직접 목격할수 있게 되는 것? 이미지에 영향받지 않을수 있는 자신? 모든 거품을 걷어낸 사용가치만으로써의 사물? 그렇게 살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고 굳이 가상과 실재를 구분할 필요성 또한 또렷하지 않다. 둘을 분리하는 순간 둘 다 무너져 내리고 만다. 이미 이 세계는 가상과 실재의 일치 없이는 존재조차 불가능하다.


 그런데 대안으로써의 문제로 돌아가 보면 그가 일관되게 저항의 방식으로 얘기하는 과잉순응이라는방식이 대중이라는 한 덩어리로써 판단했을때 결과적인 ‘저항’이 될수 있을지조차도 사실 불투명하고 개별의 삶으로 봤을때는 아무런 저항의 의미도 변화의 의미도 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누군가 사회에 관해 무관심할 때 그것을 저항의 의미로써 취하는가? 를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이런 맹점은 명백히 드러난다. 이것은 변화를 얘기한다기보다는 종말을 향해 가는 자포자기한 집단자살의 느낌이 더 강하다. 실제로 저자 자신도 변화라는 것 자체에 지독히 회의적이기에 세상의 변화나 대안을 염두에 두고 논지를 전개해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구성원 모두가 이 시뮬라시옹 세계에서 살고 있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체제'에 관한 이야기라면 대안으로써 시뮬라시옹 이론은 나름 의미가 있다. 이 체제를 과도순응이든 뭐든 무너뜨리고 돌아갈 세계가 있을테니. 근데 이것은 체제에 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고, 지독히도 독한 염세주의자가 아니라면, 시뮬라크르들의 세계인 이 곳에 대한 가장 큰 문제는 “어떤 시뮬라크르를 채울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 실재와 시뮬라크르의 차이는 사라졌을지라도 시뮬라크르간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제 주목할 것은 과잉순응을 통한 무조건적인 붕괴가 아닌 ‘보다 나은’ 시뮬라크르의 재현이 되어야 한다. 시온이나 에덴과 같은 돌아갈 세계가 없다면 결국 바로 이곳에서의 시도가 우리에게 남은 하나의 선택이 된다. 모두가 스미스요원이 돼서 아예 모든걸 무너뜨릴 것인가-사실 우리에겐 그 세계가 전부인데도- 아니면 모두가 브이가 되어서 좋은 시뮬라크르를 찾아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