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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공무도하

leedong 2012. 4. 29. 14:56

 김훈의 전작들과는 다르게 본인의 기자생활 경력이 흠뻑 녹아있는,주인공인 사회부 기자의 눈으로 본 지금 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책 한권 내내 가득 들어차있기에 문체는 건조하지만 묘사는 소름끼칠정도로 세세하다. 기승전결이 여타소설처럼 뚜렷하진 않고 소설처럼 쓰여진 신문을 한편 읽은 기분이다. 즉, 기사문과 문학의 사이에 공무도하의 문장이 있다. 김훈소설을 읽는 재미란 바로 이 잘 만들어진 문장을 읽어가는 재미도 한몫할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그는 이번에도 비루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가장 최근작인 남한산성에서는 "치욕도 참을줄 알아야 어른"이라고 하였고 그를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칼의 노래에서는 대의명분에 하등 위안받지 못하는 전장속의 한 인간과 그를 둘러싼 비루하고 치사한 현실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나? 공무도하에서는 이 비루함에 대한 표현이 극에 달해서 주인공 문정수가 취재하는 사건들은 비루하다 못해 치사하고 추접스럽다.  하여, 공무도하의 주제는 결국 장철수가 처음 외쳤던 추도문의 문장으로 압축된다.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빠져죽은 백수광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백수광부의 뒤에 남겨진 아내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공무도하를 구성하는 축은 형식적으로는 크게 네가지이다. 해망이라는 공간과 사회부 기자 문정수와 문정수의 여자친구인 출판사 편집자 노목희,그리고 노목희의 동향 선배인 고향에서 노학운동을 하다가 해망에서 고철인양작업을 하는 장철수와 베트남인 후에. 그렇지만 노목희는 현세의 더러움과 떨어져 지내는 고고한 존재에 가깝고 장철수와 후에 축이라기보다는 문정수가 바라보는 비루한 현실의 한 편린에 가깝다.

 

 문정수가 취재하는 현실들이란 정말 신문의 사회면 그 자체다. 딸을 강간한 아빠를 쇠절구로 쳐죽인 아들. 비닐하우스 빈민촌에서 키우던 개에 물려죽은 초등학생. 화재현장에서 귀금속을 절도한 소방관. 사고사망자를 열사로 둔갑시키는 운동권. 사고사로 죽은 여고생을 건설업체의 폭압에 희생된 소녀로 둔갑시키는,사실은 보상금을 노리는 시민단체 등등.

 

 현실은 지독히도 비루하고 치사하고 세세하여 기사문에 다 담을수 없는 것들 투성이이며 공무도하의 세계에서 객관적인 것은 문정수가 쓰지않은 기사감들과 사건을 조사하는 경찰뿐이다. 고고한 노목희는 문정수가 그 지친 편린들을 토해내는 산골짜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거기에 영향을 받거나 그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듣진 않는다. 공무도하에서 그녀 홀로만이 비루하지 않고 고고하다. 그렇지만 그녀의 역할은 그냥 거기서 끝이다. 그 무력한 고고함을 빼면 김훈 소설의 전형적 여성상처럼 그저 아무 영향력 없는 '여자'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 노목희를 제외하고는 소설은 한권 내내 지독히도 치사한 현실의 연속일뿐이다. 거기엔 어떠한 희망도 미래에의 지향도 없다. 고고한 존재인 노목희는 보다 나은 미래를 안고 한국을 떠나지만 그녀는 현실과 철저히 분리된 존재니 큰 의미가 없다. 장철수는 신장을 팔고 악화된 몸으로 고향을 떠돌고,후에는 비루하게 농사를 지며 살것이며, 문정수는 무좀에 시달리며 곳곳을 취재하며 계속 그렇게 비루하게 살아갈 것이다. 강을 건너지 못했으므로. 이 모든 비루함들이 말하는 것은 "우리의 삶은 원래 이런 것이며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다.

 

 우리 대부분에게 현실은 개선되거나 나아져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던적스럽고,치사하고,비루해지며 떼를 묻힐수밖에 없다. 이것이 김훈이 항상 말해온것이 아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삼전도에 나가서 머리를 찧어야 하고 먹고살기 위해서는 대충 눈감고 입을 닦고 치사해져야 한다. 맞다. 우리 삶은 그렇게 하찮다. 우린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니까. 김훈이 말하는 우리 삶의 치욕과 비루함을 긍정하자는 것에,이 비루하고 세세한 현실들은 글로 표현될수 없다는 점에 나는 정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그런 환기에 있어서는 김훈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누구도 따라갈수 없다. 아마 작가가 기자생활을 오래한것에 서 나온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비루한 현실을 인정해버리고 때를 묻히면, 그 다음은 아무것도 없는걸까?

 

삶의 비루함 자체야 어쩔수 없더라도 똥 묻은 자신에 대해 작게나마 죄책감을 가지는 삶과 어차피 묻은 똥 이제 신경쓰지 않겠다는 삶은 정말 엄청난 차이를 불러온다. 김훈이 나아가는 지점은 인정, 딱 거기까지다. "너만 더러운거 아니야 다 더럽게 살아" 그 다음이 없다.

 

"그렇지만 염치는 갖자"라는 그 한마디가 김훈에게 있어서는 어른이 가져서는 안되는 사춘기 소년의 감수성인것 같다. 자기의 의지대로 더럽게 사는것과 더럽게 사는것을 감수하는 것에 대한 경계가 김훈의 세계에서는 너무나 모호하다. 그 세계에서는 굳이 때를 묻히지 않더라도 살아갈수 있는 자들의 패악질도 어른의 고뇌로 변질되기 쉽다. 김훈이 그런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는것이 아니다. 김훈식으로 세계를 바라본다면 그런 것들에 대해서도 결국 인정할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살진 않는다.똥을 싸면서도 미학책을 읽는게 사람 아닌가.

 

 김훈 자신의 말처럼 문학이 꼭 희망만을 얘기할 필요는 없다. 이 '비루한 현실'에 대한 환기도 중요하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삶의 개선이 꼭 미래의 희망만을 가지고 이루어지는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희망이건 진보건 어쨌건간에 우리가 염치는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염치마저 살기위해서 버려야 할 무엇에 속한다면 그 세계에 무엇이 남는건지 난 아직 잘 모르겠다.

 

 김훈이 꿈꾸는 세계는 염치마저 사춘기소년의 고민 대상이고, 먹고 사는 문제가 급하니 뻘소리 안하는 그런 세계로만 느껴진다. 김훈은 분명 괜찮은 대중작가지만 그의 메세지는 결국 "얘가 아직 덜굶어봤구나"라는 어르신의 훈계를 문학적으로 꾸며놓은 버젼이다. 

 

 그렇다면 계속 나타나는 김훈 열풍은 결국 우리가 그런 세계로 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사실 비루함조차 인정 못하는 자들이 태반이지만 확실히 다들 염치는 없어지고 있는것 같다. 결국 현실적으로 김훈이 하는 것은 염치없음에 대한 합리화가 되버리는게 아닐까. 비루한것과 염치가 없는것은 분명 다른 문젠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