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보이지 않는 도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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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같은 대도시에는 수많은 건물들이 존재한다. 하늘을 찌를듯한 마천루들과 다양한 형태의 건물들을 보고 있자면,도시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모습은 이런 건물들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실제로도 외국에 소개되는 서울의 모습들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서울에 대한 이미지란 수많은 건물들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저녁 무렵 퇴근 시간에 그 도시 사이사이를 가로지르는 사람들을 보다 보면 이들이 이루는 동선과,이들이 가지고 있는 서울에 대한 이미지들이 어쩌면 이 도시의 본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것도 사실이다. 지도를 보면서 나오는 서울의 모습은 마치 찢다만 쥐포같은 미묘한 경계를 가진 덩어리이지만 실제로는 경계선이 불확실한 생물과도 같은 곳이며, 노선도로 구성된 서울은 수많은 실로써 구성된 알수없는 형체이다.
누군가 서울의 한 동네에서 자기가 사는 곳을 잘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에겐 그 동네가 바로 서울이 될 것이며, 서울시장에게는 서울이란 자신의 계획을 관철하기 위한 하나의 덩어리가 될 것이다. 누군가에겐 노다지와 유흥의 도시지만 누군가에겐 가족이 죽은 절망과 폭압의 도시이다. 그 어느 하나를 이것이 진짜 서울의 모습이라고 얘기할수 있을까?
우리가 사는 삶의 공간은 이렇듯 너무나 많은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 이 다양한 층위들은 우리 자신이 부대끼며 살아야 할 타인의 삶과, 공간과, 사회에 직결되기에 이를 놓칠수록 우리의 삶은 그만큼 더 협소해지고, 바람직한 삶은 요원해진다. 서울을 수많은 자들을 내모는 절망의 공간으로써 바라보느냐, 그저 놀기좋은 화려한 도시로써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철저히 달라진다. 그러나 우리의 한계상 우리는 자주 이런 다층들을 놓치기 마련이며 가끔 이 보이지 않는 다층들을 잡아내기 위해 주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그것이 언론이 될수도 있고,특정한 종류의 활동이 될수도 있고,예술이 될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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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라는 것이 할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 현실에 대한 환기라고 했을때, 이 맥락에서 환상문학의 효력이란, 어처구니 없는 설정을 통한 현실의 전복이 역설적으로 어떻게 다시 현실을 각인시키느냐에 많이 좌우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우화의 극단점에 가 있는 것이 환상문학이라고 할수 있을텐데. 그런 의미에서 보르헤스,마르케스 등의 작가들이 예술로써의 환상문학을 완성시킨 대가들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하 도시들)을 쓴 이탈로 칼비노의 경우도 이들과 함께 환상문학의 대가로 손꼽힌다는데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기사나 몇몇 저서들을 통해서 이 소설의 독특한 회화적 구성에 대해서 들어봤을 뿐 저자가 그정도의 사람인지, 이 책이 어떤책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도시들'은 내가 읽었던 지금까지의 소설들 중 가장 독특하고 가장 인상적인 소설로 자리매김했다. 우리가 소설을 읽을때, 즉 이야기를 대할때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문장이 문법과 체계를 가지듯,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야기 또한 나름의 법칙을 가지고 기승전결의 구조를 따라간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있고,조연이 있으며,이들이 이루는 갈등과 처한 배경이 이야기를 결말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의 이야기이며,이것은 꼭 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영화를 볼때도 연극을 볼때도 우리는 항상 기승전결을 염두에 두고 보기 마련이다. 이것은 지극히 문자문화적이고 선형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시각예술을 볼때 기승전결을 생각하던가? 그림이든,사진이든 시각예술을 볼때 중요한 것,영상문화에 중요한 능력은 단편적 이미지들에 대해 얼마나 잘 표현해냈는가(색감 혹은 빛의 조절),그리고 그 단편적 이미지가 무엇을 표현해내는가를 잡아낼수 있는 능력이다. 물론 의미를 잡아내기 위한 소양은 문자문화의 해독에서부터 길러지는 것이지만 해독은 전제조건일뿐 방법은 아니다. '도시들'을 읽을때는 이러한 시각적 자세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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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들'의 구성은 문자문화적이기 보다는 영상문화에 가깝다. 인물이 주인공이 아니라 다양한 모습의 환상적인 도시들이 주인공이며 사건이 아니라 도시들에 대한 뛰어난 묘사만이 존재한다. 여러가지 이야기들은 나름의 테마-도시와 죽음,도시와 기호-등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이 선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한 지점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서사구조는 전무하고, 모든 이야기들이 나름의 경계선을 가진채 각자 독립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읽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나름의 연결선을 만들어 낼수도 있다.
이처럼 '도시들'은 어느 파트를 먼저 읽어도 상관이 없는 도록과도 같고, 묘사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그것이 가진 의미를 만끽하는 소설이다. 이탈로 칼비노는 수십개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도시들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지만 그 모습들은 단 하나의 도시, 혹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해 '도시'라는 이름들을 붙여놓고 묘사한 것이기도 하다. 도시속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도시의 탄생과 멸망에 관한 이야기, 도시의 성장 혹은 도시의 의미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새로운 시각으로 삶의 공간에 대하여 바라볼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실제로 이 책을 한번쯤이라도 읽고 우리가 사는 세계를 바라본다면, 이 세계는 크게 달라 보이진 않더라도 전과 같은 모습으로 다가오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전환을 주는 작품은 그리 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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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러한 도록같은 이야기에도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이 모든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존재한다. 이탈로 칼비노의 작중 분신인 마르코 폴로는 마지막에 자신의 벗인 칸이 도시에 대해 허무하다며 한탄을 내뱉자 이렇게 답한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현실에서 천국을 찾자라는 이야기, 지극히 당연한 주제고 상투적인 주제라고? 그러나 이 상투적인 이야기도 이러한 독특한 형식을 거치면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중요한건 주제의 참신성이 아니라 그 주제를 전달하는 형식과 방법이다.
'도시들'에 묘사된 수많은 공간들, 그것이 천국같았건,혹은 지옥같았건,현실적이건 환상적이건 그것들 자체가 이미 사실 현실에서 떨어진 것,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곳에 있던 모습을 잡아내어 다른 모습으로 비유한 것들에 불과하다. 작중에서 마르코 폴로는 칸에게 우리가 나누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들은 사실 존재하는 걸수도,아닐수도 있다고 말한다. 중요한것은 그 모습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이다. 이 환상들을 실제의 묘사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그저 백일몽으로 치부할 것인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하나의 모습뿐이라고 믿고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수많은 공간과 수많은 시간으로 이루어진 겹겹의 세계라고 믿고 살아갈 것인가.
결국 중요한건 그것이 현실적인가 환상적인가(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가 아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과 공간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수 있느냐이며 어떤 가능성을 열어주느냐이다.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우리 눈앞에 펼쳐진 적나라한 '보이는 도시들'이기도 하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지옥을 만들어 가지만 천국에서 살수도 있고 천국을 만들어 갈수도 있다. '도시들'에서 우리가 얻을수 있는것,그리고 작가가 주고 싶었던 것은 현실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공간을 부여하는' 힘이다. 물론 모든 글들이 그렇듯이,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우리네 삶의 공간에 대해 말한다는 것을 잡아내는 것만으로 힘이 나오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를 위한 단초로써 새로운 인식을 제공하기엔 충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