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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

소비에 대한 어떤 태도




서울대 기숙사 '택배 보관료 300원' 꼬박꼬박


서울대로 배송되는 택배 물량 중 수령인에게 바로 전달되지 않아 영업소에 맡겨지는 택배에 대해 300원씩 추가비용이 발생하

고. 그 비용이 택배기사들에게 전가된다는 요지의 기사다. 책임의 주체가 이 기사에서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댓글들로 추정해 본다면 모 택배회사의 영업소가 건당 300원씩 요구하고 있고, 이에 대한 비용 전가가 결국에는 택배기사 개개인에 대해 가해지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어느 쪽에 책임을 묻고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 이전에 눈에 띄이는 건 댓글의 반응들이다. 한건당 600~900원을 받는

택배기사의 열악한 처우를 걱정하며 서울대와 택배업체들을 비판하는 글들도 많지만, 택배기사들의 불친절을 이야기하며 당연히 택배는 수령인에게 직접 전달해줘야 하는게 아닌가, 300원은 그 의무를 다 하지 못했기에 무는 책임비용이다-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물론 내가 지불한 비용에 걸맞는 서비스를 받고 싶은 것은 당연지사이니 이런 주장들을 무조건 비인간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수령자 대다수가 수령지에서 벗어나 있는 상황이 많아 실제로 택배를 경비실이나 보관소에 맡길수밖에 없다는 현실적 문제를 너그럽게 제외하더라도,  실제로 택배 이용자들은 쇼핑몰 이용 기준으로 최소 2500원에서 3000원 정도의 택배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문제는 진짜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는 택배기사들에게도 3000원 가량의 돈이 돌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한 건에 600~900원을 받는 상황에서 과연 소비자는 어디까지 그 서비스를 요구할 수 있는가?


    시장의 논리에 따르면 소비자, 혹은 사용자가 지불한 값에 상응하는 서비스(=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노동자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언뜻 객관적이고 공평하게 보이는 이 논리의 가장 큰 구멍은 '상응'의 기준이라는 것이 서로간에 도대체가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대체로 서비스직에 대해서 그런 경향이 강한데. 예를 들자면 택배비 3000원을 냈을때, 거기에 상응하는 서비스란 택배기사가 어떻게든 내가 있는 곳에 찾아와 물건을 친절한 태도로 직접 주고 가는 것인가? 아니면 어제 주문하면 오늘 도착하는 것 처럼 빠른 배송을 진행하는것이 내가 지불한 값에 '상응'하는 것인가. 어떤 이들은 택배기사가 경비실에 물건을 맡기고 문자만 띡 보내는 것을 보며 '적절한 서비스를 받지 못했다'라고 분노하고, 어떤 이들은 그저 익일 배송된 것 만으로도, 어디에 놓았는지 말해주는 것 만으로도 가격에 비해 과한 서비스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어느쪽이 더 정확할까? 600원에 우리는 웃음값을 포함시킬 수 있나? 

     물론 개개의 사례 속에는 정말 터무니없이 업무를 수행하는 기사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들 조차 어떤 경제적인 문제의 누적 결과라면 이걸 단순한 인성이나 도덕의 문제로 얘기하기는 어렵다. 엄밀히 따져보면 택배비 3000원은 기사와 나 사이에 1:1로 발생하는 계약관계에 대한 지불 비용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와 택배기사 간의 비용은 300~600원 그 어느 지점에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정확하게 따지면 이 조차도 맞지 않겠지만.)

     사실 나는 우리가 지불하는 택배비 2500-3000원은 너무 싼 가격이라고 생각한다. 택배비는 좀 더 인상되어야 하고, 그 비용 중 기사들에게 돌아가는 분배금은 더 커져야 하는 것이 맞다. 실제 그 업무를 수행하는 이들이 겪는 노동 강도와 서비스의 속도를 생각한다면 소비자가 부담해야 하는 택배비용은 더 비싸져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인덕이니 인망이니 하는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경영자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시장경제'를 생각해봐도 그렇다. 열악한 처우로 연말연초에 택배기사들의 대량 이탈로 인해 물류에 큰 지장이 생겼던 사건을 생각해보자. 앞으로도 이런 상황은 계속 발생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택배업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닐테다.

     고도의 서비스를 요구하면서도 저렴한 임금과 정신교육을 통해 그것을 달성하려는 것이야 이 시대 어느 지역을 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트의 저임금 계약직에게 앉아있는 것 조차 간신히 허용하고, 거기에 대해서 민원을 제기하는 이들이 꾸준히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택배만 예외일 리는 없다. 택배에 대한 태도는 우리의 '소비'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이 개인적 생각이다. 그 태도란 경제적인 것 처럼 말하지만 (내가 낸 돈 만큼의 서비스) 전혀 경제적이지 않은 태도 (실상은 그 서비스에 비해 과도하게 저렴한 지불)이다. 비단 소비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용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이 좋아하는 경제적 태도, 효율성 등을 그 스스로의 경영에 비추어 봤을 때 과연 몇이나 그 기준을 통과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가 지불한 비용에 대한 적절한 서비스를 이야기하기전에, 우리는 경제적으로 냉정히 생각했을 때, 그 서비스를 요구한 만큼의 금액을 지불하고 있는가?  우리는 쉽게 계약관계를 입에 올리지만 우리에게 계약관계로 표상되고 인지되는 많은 것들은 실제로 비합리적인, 혹은 합리를 가장한 비용 전가를 통해 저렴하게 제공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저렴한 서비스에 대한 요구는 언제나 항상 있어왔다. 특히나 요즈음 우리 사는 세계는 물가는 폭등하고, 사는건 녹록치 않다. 택배기사나 사무직이나 백수나 직장인이나 살기 빡빡한 건 마찬가지다. 택배의 서비스 질 하락 만큼이나, 저가에 고급 서비스를 지나치게 바라는 우리의 태도 또한 어떤 경제적 요인들에 의하여 누적되고 길러진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소비자가 도덕적으로 각성하거나 훈계되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외려 합리적으로 사고되어야 하는 문제일 것이다. '인간으로서 어찌 그럴수 있느냐'가 아닌. '공평하게 비용을 가지고 생각해보자'라고 말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질문일지라도 근본적인 '감정'이 투영된다. 과연 우리는, 한건에 300원을 받고 매일 매시간을 웃으면서 모든 사람에게 직접 물건을 전달 해 줄 수 (혹은 계산을 해 줄수, 웃을 수, 상담할 수, 창작할 수) 있는가?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제대로 된 시장경제가 이루어지면 모두가 잘 살거라는 시장주의자들의 희망을 가지고 싶어질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