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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공연

[퍼시픽 림] - 오로지 로봇물.





  이미 나온 애니메이션을 실사로 만들고 관객들 머릿속 상과 맞네 안맞네 다투는 것을 보는 것 보다, 오리지널 컨셉을 가진 영화로 만들되, 로봇물과 괴수물이 주는 장르적 쾌감을 극대화 시킨 결과물이 <퍼시픽 림>이 아닐까. 압도적 크기, 대책없는 파괴, 짜릿하다 못해 숭고할 지경인 인간형 로봇의 액션 등 <퍼시픽 림>은 어디선가 본 것들을 모아다 실사로 조합해낸다. 근데 카이주니 예거니 드리프트니 몽땅 다 어디선가 본 모습들이지만 분명 새롭다. 이것이 애니메이션이 아닌 영화라서 그럴 것이다. 사람의 손으로 그린 그림을 통해 장엄함을 보는 것과 그것이 그래픽일지라도 어찌되었건 실사의 형태를 띄고 있는 장엄함을 보는 것은 다르다. 사람이 오감을 가지고 현실세계를 사는 이상 당연한 귀결이다.


  배우들의 발연기와 드라마의 엉성함을 이유로 이 영화를 폄하하는 평들도 있지만 나는 이정도 되면 좀 관대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물론 다른 장르라면 아무리 비주얼이 압도적일지라도 드라마가 <퍼시픽 림>같다면 가혹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로봇물은 언제나 로봇의 간지와 필살기가 메인중의 메인이 아니던가. 에반게리온이나 건담같은 로봇물을 가장한 휴먼드라마 말고 가오가이거나 철인 28호 같은 전투와 기합으로 가득한 철혈 넘치는 진짜 로봇물들 말이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군국주의적 비장미가 철철 넘쳐흐르고, 우렁찬 기계소리로 가득하며 온갖 주먹질과 도살로 가득한 이 영화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은 오로지 거대로봇과 괴수의 사투를 우리 눈앞에 보여주는 것이다. 어찌보면 실로 극단적인 영화지만 로봇물이기에 가능한 관대함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제 비쥬얼에 스토리가 압사당하는 시대'라는 고리타분한 탄식도 할 필요가 없다. 메세지가 필요한 작품은 또 그 나름대로의 형식들을 다 갖출 것이다. 


 스토리냐 비쥬얼이냐의 일도양단을 떠나, <퍼시픽 림>은 목적하는 바가 명확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은 매우 성공적이다. 그 집중력과 효율성이 예거만큼이나 매력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등학생 때 한 선생님이 내게 한 말. '영화는 시각예술이기에 스토리에만 집착하지 말아라'라는 말을 씨네큐브에서 틀어주는 영화도 아니고 CGV 왕십리 아이맥스에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고 실감하게 되다니..


 *그러고보니 얼마전 어떤 어르신은 시각적으로 충격을 주지 못하는 영화들은 진짜 영화가 아니며 지금 영화들은 너무 복잡하기만 하다고 탄식하셨다. 그 분이 꼽았던 진짜 영화는 <벤허>였는데, 아마 당시 <벤허>의 마차경주씬이 주는 스펙터클을 염두에 두신 말일 것 같다. 영화=예술이라고 할때 영화를 전공하지 않은 우리같은 이들은 스토리에 집착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어쩌면 그분의 말이 영화의 어떤 본질을 꿰뚫은 이야기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본다면 <퍼시픽 림>은 시각이라는 의미에 참 고전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다만 전투의 디테일이 부족하여 아이맥스에 3D까지 겹쳐서 보면 전투씬이 한눈에 안들어오는 단점이 있다. 일반 상영관에서 제대로 한번 다시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