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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공연

[설국열차] 설국열차를 싣고 달리는 설국열차.





-몇년을 기다려온 설국열차 였던가. 보는 내내 짜릿함에 시달렸다. 나는 이 영화가 너무 좋고, 시간이 되는 대로 몇번은 더 보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봉준호의 냉소적 태도도 여전하고, 장면 장면이 주는 시각적 쾌감과 곳곳에 숨겨진 상징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렇게 영화를 보고 좋은 기분으로 극장을 나오다 보니, 곳곳에 붙은 홍보물과, 얼마전 한 프랜차이즈 멀티플렉스로 바뀐 극장이 보였다. 문득 설국열차가 가지고 있는 메세지와 상징을 이야기하는 것 보다는, 설국열차를 둘러싼 현실의 상황들을 이야기해보는 것이 더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흡이 쓴 <영화가 정치다>라는 책을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는 산업이기에 자본이 투입되고 수익을 내야 한다. 그러나 구조적으로는 기존 체제에 친화적일지라도 흥행을 위하여 내용적으로는 반체제적인 내용을 다룰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권력과 자본을 칭송하는 내용이 나와서야 사람들이 볼 리가 없다. 흥행을 위해서는 대중의 저항적 욕구를 반영해야 한다는 게 이 주장의 요지다. 원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정확한 글귀는 아니지만 대략 뜻은 맞을 것이다. 


 <설국열차>야말로 이 이야기에 가장 잘 맞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설국열차>가 다루고 있는 이미지와 내용,메세지들은 그것이 순수하게 SF적 설정에서 나온 이야기이건, 봉준호의 이념을 표현한 것이건 간에 매우 반자본적인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 두명의 대립은 거칠게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엔진을 점거하여 보다 평등하고 멋진 열차를 만들 것인가?(착한 자본주의, 혹은 현재의 노동조합 운동) 아니면 아예 이 열차 자체를 탈출하여 새로운 세계를 만들 것인가.(사회주의 혁명, 혹은 가라타니 고진이 말한 협동조합 운동) 어느쪽이 되었건 기업들이 썩 좋아할만한 사상들은 아니다. 


  하지만 <설국열차>라는 영화를 둘러싼 환경은 전혀 그렇지 않다.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었고, 대규모의 이벤트가 치뤄졌으며, 제작사는 엄청난 물량전을 치르고 있다. 한국 영화 사상 최대라고 한다. 반자본주의적 메세지를 실어나르는 <설국열차>를 움직이는 힘은 그야말로 자본주의의 지치지 않는 엔진에 기반하고 있다. 수많은 스텝들이 고군분투하며 이 열차를 움직인다. 그렇게 본다면 이 영화야말로 정말 역설적이다.




 이게 비단 <설국열차>만의 상황은 아닐 것이다. 모든 영화는 자본이 들어가고 수익을 창출해야만 한다. 리얼한 상황을 표현해내기위해서는 많은 돈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물론 나는 이 영화 한편 만드느니 독립영화를 몇편씩 만드는게 낫다는 이들의 말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영화가 산업화됨으로써 얻는 많은 이득들 또한 존재한다. 구조적으로는 자본주의의 극단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저항적이어야 하는 영화의 이중성 안에 점진적 변화들이 존재한다는 생각 또한 일정 부분 지지한다.


  그러나 <설국열차>가 처한 아이러니 - 노동당원인 감독과 대규모 자본, 저항적 스토리와 자본주의적 운영-들을 마냥 무시하기도 어렵다. 벌써부터 영화에 대한 다양한 평들이 오고 가고 있고, 이 영화를 사회주의적이다, 저항적이다. 라고 찬사하는 SNS의 글들도 여럿 보인다. 그런 글들을 보면 미묘한 기분이 든다. 관객들은 분명 횃불씬에 희열을 느끼고, 남궁민수의 제안에 놀라움을 느끼겠지만, 그러한 메세지를 강조하는 것은 현재 이 영화를 둘러싼 상황속에서 비웃음속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430억짜리 영화가 말하는 반자본주의라니. 그런 찬사를 쓰고 읽는 이들 또한 일종의 정신분열을 느끼지 않을까. 그런 비평을 통해 설국열차를 보고 있자면 혁명과 자유와 해방을 이야기하는 북한의 대규모 매스게임을 보게 되는 느낌이다. 설국열차의 배급방식이 신자유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 것과, 이 영화가 혁명적 메세지를 전달한다고 말하는 것은 뜬금없기 매한가지다.


  그러한 외적인 요소들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던 봉준호에 대한 그간의 평가와 정치적 지향성을 배제한 채, 오히려 이 영화를 순수한 SF 영화로 판단하고 감상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실제로도 영화는 정치적 지향과 상관없이 매끄럽고 아름답고 흥미롭게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고 운영된다는 것은 이 영화의 완성도와 재미에 흠을 내지 않는다. 꼭 한번 보라고 누구에게나 권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를 둘러싼 현실은 이 작품에 어떤 사회적 의미와 메세지를 투영하고자 하는 시도를 비웃음과 같은 형태로 막아선다. 횃불은 그냥 스펙타클로, 남궁민수의 제안은 설정 상 자연스러운 결론으로 그 의미가 제한된다. 다르게 말하자면, <설국열차>를 변호하는 몇몇의 평들-이 영화는 장르물이라느니, 봉준호에게 과도한 사회적 메세지를 기대하는 건 좋지 않다느니-자체가 그런 현실을 의식한 회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완성된 영화에 대하여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시도가 영화 속에서 열차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와 같다면, <설국열차>를 실어나르는 현실의 설국열차에는 빠져나갈 구멍이 마땅히 없어 보인다. 


 영화를 둘러싼 외적인 조건들이 영화의 메세지를 받아들이는 데에 크게 제약을 가하지 않았던 봉준호의 작품은 <마더>가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영화가 꼭 사회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사회적 메세지를 다룰뿐 아무런 미덕도 없는 26년,도가니,부러진 화살과 같은 영화들이 더 많았던 요 몇년이었다.


 다만 나는 이 영화에 무리하게 사회적 메세지를 접목하려는 시도들이 매우 덧없고, 이율배반적으로 보인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그런 것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설국열차는 충분히 훌륭하고,멋있고 무엇보다 '재밌는 영화'이다. 전국 대다수의 상영관에 걸려야 하는 영화의 최 우선 미덕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