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에서 얼음물 어쩌고가 검색 순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름에 냉수마찰이 유행인가? 라고 의아해 한게 엊그제다. 그 며칠 사이에 한국은 온통 '아이스 버킷 챌린지' 타령이다.(이하 IBC) 지극히 미국스러운 이 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이들이 IBC를 비판하는 요지는 다음과 같다.(나를 포함하여)
1) IBC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진정한 루게릭병 문제 해결에 있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2) 유명인들의 이미지 환기용, 마케팅용으로 사용될 뿐, 캠페인의 의도와 실제 기부 방법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
3) 한국 사회의 기형적인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이벤트이다. 한국에서 관심을 모으고, 동정받기 위해서는 무색의 순결한 주장없는 피해자여야만 가능하다는 걸 이번에 다시 확인했다.
4) 작위적이고, 자위적이다. 쉽고 편한 방법으로만 사회참여하고 만족감을 얻으려는 행위이다.
각 주장들은 약점도 있고 강점도 있다. 타당한 부분도 있고, 비약도 있다. 비판적인 사람들의 입장 만큼이나 호의적인 사람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 호의적인 이들의 입장이 IBC가 몇년이 지나도 모으지 못한 돈을 ALS재단에 안겨줬다는 점. 그리고 그 돈이 병원 건립에 쓰일 거라는 결과 등으로 강화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비판은 예측이고, 무형의 것이며. 찬성은 실제 결과로서 나타나고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이 글에서 각 주장 간의 대립을 따지고 IBC가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어제 느꼈던 당혹감을 하나 공유하고 싶다.
어제 여자친구가 메신져로 내게 사진 하나를 보냈다. 김영웅씨라는 분의 IBC 사진이었다. 골형성부전증을 앓고 있는 그는 '외국의 스타들을 따라서 얼음물을 끼얹을 용기를 내는데, 정작 우리 모두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나서지 않는 걸까?'라며 세월호 특별법 통과에 대한 환기와 유족에 대한 위로의 의미로 스스로에게 얼음물을 끼얹었다.
솔직히 말하면 진짜 감동 받았고, 이런 IBC라면 나도 동참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정말 많은 이들이 이런 걸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뒤 이어 밀려오는 몇가지 당혹스러움에 금새 직면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기존의 IBC에 대하여 비판했던 것들이, 과연 세월호 특별법 통과를 목표로, 혹은 의료보험 민영화 비판을 목표로 IBC를 행한다고 하면 사라질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당연히 최초로 이런 뜻있는 시도를 한 김영웅씨의 발상과, 용기와, 선의를 존경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존 IBC에 대하여, 너무나 쇼적이다, 기형적이다, 임시방편이다. 라고 말하는 것들이 루게릭을 빼고 세월호 특별법을 넣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일까. 잘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그건 너무나 편향적인 태도가 아닐까. 다를 수 있다면 도대체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내가 어제 느낀 당혹감은 이런 것들이었다.
물론 두가지는 같은 선상에 있으면서도 다른 문제다. 루게릭병 환우들의 고통이 제대로 된 공보험 혜택을 마련하지 않은 국가에 있듯이, 세월호 사건 또한 국가에 책임이 있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발생 원인에 국가의 책임이 없고, 후자는 발생 원인까지도 국가에 책임이 있다는 점일 것이다. 또한 현재 진행되는 IBC가 분명 유명인들의 인맥 자랑과 마케팅을 위한 용도로 사용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적어도 세월호라는 이슈에 대해서는 그렇게 사용될 수 없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일베를 즐겨하는 이들은 김영웅씨의 사진과 영상에 '순수한 환자들을 위한 캠페인을 정치적 목적으로 변질시키지 마라'며 아우성을 치며 두가지를 분리한다. 물론 이들은 루게릭병 환자들이 공공의료보험의 확대와 혜택을 이야기하는 순간 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거기에 맞서 우리 또한 세월호 특별법 이야말로 연대와 실천이 필요한 이슈이고,오히려 루게릭병의 문제보다도 훨씬 더 누군가의 책임을 요구하기에 더 IBC를 통한 환기와 연대를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말을 약간만 뒤틀어보면 일말의 진실이 있다. IBC가 근본적 문제해결에 도움이 안된다고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던 이들이라면, 그것이 어떤 이슈에 관한 것일지라도 IBC라는 형식 자체에 대해 비판적이어야만 하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 이 형식을 취하고자 한다면. IBC
연쇄 발생이 분명 효과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다만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이슈에 걸쳐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안타까웠던 거라는 점 또한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한국사회의 왜곡된 연민이야 어차피 항상 상수였던 것이었으니. 그 편향에 들고자 하지 않은 사람들이 고민할 문제이겠다.
잡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