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상적인 수식어를 달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상적 상태를 우리는 꿈꿔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란 "권력의 반대편의 힘을 모으는 것" 이라던가 "공동의 상상체를 만드는 것"이라는 말로 설명될 수 없는 수준의 행위가 아니다. 자본주의와 미디어로 이루어진 세상이니 만큼 정치는 돈과 미디어로 움직이고 그것이 사람들의 큰 열망을 반영할 지라도 세상의 틀이 그 둘로 이루어진 이상 열망 또한 그 틀을 거쳐서 주조되고 왜곡된다.
<킹메이커>의 원제인 The Ides of March의 의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쓰러졌던 날을 의미한다. 이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카이사르의 대의와 브루투스와 공화파의 대의가 충돌한 듯 보이는 카이사르 암살사건은 기실 그 이면을 뒤집어보면 권력층들의 암투와 협상의 연속에 불과하다는 것을 많은 역사가들이 이야기해왔다. 사실 이 용어 자체가 한국에서는 생소한 탓에 <킹메이커>라는 이름으로 번역 되었을 뿐 원제 자체가 영화의 성격에는 더 적합할 것이다.
"진보적"인 성향으로 대통령이 되면 세상을 바꿔줄 것이라는 기대를 받는 마이크 모리스 주지사. 그에게 충성을 바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야수로 돌변하는 스티븐, 스티븐을 이용할 생각에만 골몰해있는 기자와 공화당 선거담당자 등 <킹메이커>는 모리스의 대의와 공화당의 대의가 충돌하는 이면에 존재하는 그들의 현실을 영화는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역선택 투표(국민경선과 같이 당원자격 여부에 상관없이 투표가 가능할 때, 상대편의 강한 후보가 경선에서 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경선에 참가하는 것. 예를 들자면 민주당의 오바마 선출을 막기 위해 공화당 지지자가 경선에 참여하여 표를 던지는 경우를 상상하면 된다.),미국 특유의 선거인단 제도,네거티브 광고 등 다양한 현실이 영화를 통해 드러난다. 어쨌든 이 모든 것이 보여주는 것은, 정치라는 것이 무언가를 대표하거나, 이상을 향해 협의해가거나 하는 것이 아닌 수많은 직업정치가, 그리고 거기에 관련된 직종을 가진 이들이 욕망을 드러내고 싸우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아 그래 역시 정치는 더러워!"라고 말할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과는 차이가 있지만 정치라는 것이 결국 지지자의 대표가 아닌 중심부에서의 권력투쟁을 통해 결정된다는 것이 실감난다. 이건 꼭 영화를 보지 않아도 우리가 뉴스를 볼때마다 느끼는 사실이 아닌가? 영화의 사례와는 다르지만 정권 말기마다 이제 수명을 다한 대통령과 차기 대선후보간에 모종의 협의가 이루어진다는 점 정도는 이제 일종의 상식이다. 정치라는 것이 이상주의자들의 협동으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현실적인 권력투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의 뉴스와 <킹메이커>는 영상화된 <군주론>과 다름 없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면서 한발짝 더 나아가 생각해 볼 것은 정치혐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것을 만들어 내는 정치를 둘러싼 환경일 것이다. 정치를 실질적으로 기능하게 하는 (여기서 정치란 우리가 이상적으로 말하는 그 정치가 아니다) 미디어와 자본의 환경을 생각하지 않고 이상주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티비광고 한번을 타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정치세력의 존재에 대해서 알 수 없고, 아무리 지역에서 무언가를 조직하고 민심을 얻더라도 득표율은 7.8%에 그친다. 사람들은 이상적인 정치인들이 정치를 하기보다는, 현실적으로 힘을 가진 정치인이 이상적 정치를 펼쳐주길 바란다. 그러나 <킹메이커>가 보여주듯이, 그들을 욕망덩어리로 만드는 외부적 조건이 존재하는 한 두가지 다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조건이 충족되더라도 나이든 남자는 20세 인턴을 욕망할 것이고 진영이 갈린 이상 서로에 대한 공격은 계속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양상은 다소 다르지 않을까 더불어, 당장의 조건이 이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열망과 이상은 무엇이며 그것을 유지할 방법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정치가 미디어와 자본으로 이루어진다 해서 우리가 꿈꾸는 "권력의 반대편으로서의 정치"에 대한 꿈을 버려야 할 것인가?
모리스에 대한 "믿음"이 자신의 명예를 위한 "이용"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은 사실 정치관계자의 모습만은 아니다. 나는 거기서 노무현에 대해 사람들이 가졌던 기대와 실망을 본다. 아마 우리가 기대했던 후보에 대해 실망하고 욕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도 비슷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김어준처럼 그래도 어쨌든 정치인을 믿자-거나 닥치고 정치를 하자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옳음이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이명박을 반대해야 했던 이유는 그가 "옳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봐도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지는, 현실 정치에 대해 그 한계를 인정하고 정치인을 하나의 도구로 인식하는 것, 현실에 대한 냉소적 태도와 이상에 대한 열망을 같이 유지하는 것 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