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네이버시절/영화/공연

[2012] 해청전

서울, 문화에 빠지다

[남산예술센터] 말을 만끽하고 고전을 뒤집는 낭독공연 <해청전>

 

 

 

우리가 사는 시대는 '시각의 시대' 입니다. 시각을 통해서 거의 모든 정보를 얻을 뿐 아니라, 표현에 있어서 시각적 표현이 가장

중시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가 이미 자리 잡은 상태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당연히 사람은 모든 정보를 시각

을 통해서 얻는게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명한 미디어학자인 마셜 매클루언은 인간이 이렇게 시각에 집중, 편중되

게 된 것은 티비가 등장하게 된 요 근래의 일이라고 20세기 중반에 밝힌 바 있습니다. 이전 시대의 인간은 시각보다는 청각에 더

집중했다는 것이죠. 즉, 인간이 집중하는 감각은 문명의 산물입니다.

 

이는 문화예술의 향유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아무리 좋은 공연이라도 스펙터클 (여기서 스펙터클을

시각적 볼거리라는 의미로 사용한다면) 한 구석이 없다면 그 공연에 잘 집중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화야 두말할 나위

없고 대극장, 소극장 가릴 것 없이 모든 종류의 공연들은 끊임없이 시각의 문제에 신경을 씁니다. 어떻게 해서 주어진 조건 내에

서 관객의 눈을 사로잡을 시각적 연출을 해낼 것인가? 더군다나 이런 시각적 연출 자체가 극의 질을 완성하는 요소이기도 합니

다.

 

뮤지컬, 영화 등은 애시당초 시각의 시대에 태어난 장르이니 그렇다 쳐도, 중요 공연예술중 하나인 연극은 어떨까요?

사실 연극은 다른 분야들과는 다르게 '청각의 시대' 에 태어나 '시각의 시대' 에 까지 살아남은 장르입니다.

연극은 원래 무대 위의 말들과 코러스들을 통해 관객에게 끊임없이 가정된 상황을 상상하게 하는 공연 형식이었습니다.

역할에 따른 배우의 배치, 무대 구성등의 연출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연극이란 '말' 하고 '듣고' 상상하는'

공연이었던 것이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연극의 방식은 사실 그 역사가 100년도 되지 않습니다. 이게 어떤 느낌인지 상상하기

어려우시다면, 우리가 어렸을 적 어른들이 읽어주는 동화가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는지 되새겨 본다면 좋을 듯 합니다 :)

 

 

| 낭독공연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남산예술센터가 2011년의 마지막 공연으로 선택한 <해청전> 낭독공연은 '말' 을 만끽하는 연극의 본래 모습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공연이었습니다. 처음에 낭독 공연이라는 말을 들었을때는 '시 낭독같은 건가?' 라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공연을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한사람이 글을 쭉 읽어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해설자가 해설을 읽고, 배우들이 자기 배역의 대사

들을 읽으며 최소한의 연출만 곁들인 형식이었습니다. 배우들은 장과 막이 바뀜에 따라 각본을 들고 퇴장과 입장을 반복하며

이야기를 끌어나갑니다.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연극과 다른 점은, 낭독만으로만 공연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모든 상황을 해설과 대사를 듣고 상상해야

한다는 겁니다. 무대에 배경이 갖추어져 있고, 장치들을 활용하는 완성된 연극들과 달리 낭독공연은 해설자가 염전이라고 하면

염전을, 창고라고 하면 창고를 상상해야 합니다. 근데 이러한 빈틈은 연극을 보는 데 있어 방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극에 더

몰입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시각적인 것을 걷어내고 아예 이야기 자체에만 몰입하게 돕는다고 할까요? 사실 이번 낭독

공연은 관객과 평단을 적극 수렴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목표였다고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냥 낭독공연으로 올려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

 

 

| 하드코어 심청전=해청전

낭독공연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놓고, 작품자체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해볼까요? <해청전> 은 <심청전> 의 리메이크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어떤 성격을 가지는 작품인지는 <해청전>을 쓴 주원규 작가의 작품세계를 보면 대충 짐작이 갑니다.

주원규 작가는 한겨례문학상에 <열외인종 잔혹사>로 등단. 이후 여러 소설과 평론집을 내며 신랄한 풍자와 도발적인 문체로

사회를 그려내는 작가입니다. 이전에 주원규 작가의 <열외인종 잔혹사>를 인상깊게 읽었던 터라 <해청전>의 작가가 주원규 작가

라는 것을 알고 내심 공연날을 다이어리에 적어놓고 기다려왔는데요. 하드코어 심청전이라는 부제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어둡지

만 신선하고 색다른 심청전이었습니다.

 

 

[시놉시스] 

정체모를 섬, 그곳에는 염전과 기근만이 창궐한다. 심봉사의 아내 숙은 친부가 누구인지 묘연한 쌍둥이 자매 청과 현을 나은뒤

바로 육지, 전쟁의 땅으로 도주한다. 생활능력이 없는 심봉사는 젖동냥을 다니는 것도 지쳐 청과 현을 유기하다시피 하고 너무

이른 나이에 철이 든 청은 포악스럽고 이기적인 현과 달리 염전 마을 남자들에게 性을 팔며 심봉사와 현의 생계를 책임진다.

 

그러던 어느날, 상인이 나타나 현을 자신의 양녀로 들이고 청은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신비의 약초를 구하기 위해

전쟁의 땅으로 알려진 뭍으로 팔려 가는데..

 

 

<해청전>은 19세 관람가가 의미하듯이, 그리고 시놉시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공연은 아닙니다.

극에서 표현되는 뭍과 섬. 그리고 거기서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주최측이 밝혔듯이 '동화속 인물들의 이야

가 아닌 지금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 현대인들의 욕망과 갈등을 반추하게' 합니다.

 

 

 

 

<심청전>에서 아이러니 했던 부분-효심을 그렇게 강조하면서 어떻게 청이가 공양미 오백석에 팔려가게 만들 생각을 했을까?-

등 나이가 들고 심청전을 다시 생각해 볼때 한번쯤 가져볼만한 <심청전>의 이면을 <해청전>은 '거래'와 '욕망' 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극대화시켜 현대적 이야기로 아주 재미있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게 풀어냅니다.

 

 

| 두가지를 기대하며..

<해청전을 보고 난 뒤 단순히 시민기자가 아닌 한 사람의 관객으로써 든 생각은 두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해청전>의 완성된 모습이 보고싶다는 것. 두번째는 낭독공연이 보다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것. <해청전>으로 인해

서 낭독공연의 묘미를 만끽하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이야기 자체가 워낙 재미있기 때문에 연출이 가미되어 완성된 <해청전>은

어떤 모습일까도 궁금하더군요. 또한 '말' 의 힘과 상상을 만끽해줄 수 있게 해주는 낭독공연을 보다 많은 분들이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실제 서울문화재단은 이미 <연희목요낭독극장>등의 기획을 통해 상시적으로 낭독극장을 해오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이에 대한인지도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낭독공연이라는 형식 자체가 다소 낯설기도 하고요. 

 

비록 2011년의 서울문화재단의 공연은 다 마무리가 되었지만 2012년도 스케쥴을 체크해보신 뒤 내년엔 낭독공연 하나쯤 관람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말과 이야기라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지니고 있는지 색다른 경험을 하실거라 장담합니다 :)

또 이번 <해청전> 공연을 계기로 해서 희곡 낭독 공연이 보다 다양해지고 상시적으로 나오길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