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에서 <브랜드 가치 1위란 기업입장에서는 좋은 일일지도 모르지만 소비자 입장에서 왜 자랑스러워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자기가 소비하는 상품이 그만큼 몰개성적이라는 의미인데 그냥 다수에 포함되면 좋다는 건가?>라는 글을 읽었다. 아마 상품소비를 이야기할 때 종종 나오는 비판 중 하나가 개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일텐데 이 말이 요 근래 나를 좀 불편하게 했다. 아마 그것은 어떤 이들의 상품소비가 그저 '아무생각 없는 행위'로 치부된다는 점에 대한 불편함과 사실 그가 진보적이라고 생각했을 주장이 어쩌면 그다지 진보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모든 가치 평가가 돈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그런 상황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별개로, 많이 팔린다는 것은 곧 어느 정도의 질이 보장되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상품생산 과정에서는 많은 탄압과 착취가 분명 존재하고. 양질의 상품임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제약때문에 팔리지 않는 상품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떼어놓고 소비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소비자들에게 쉽게 인식된 제품들 내에서 1위를 하는 상품은 어쨌든 나름의 이유가 있다. 보장된 퀄리티를 지닌 제품인 것이다.
결과적인 이야기 말고 구체적으로 들어가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상품들은 팔리기 위해서 '개성적'이어야 하고, 소비자 또한 각자의 편익을 위해서 나름의 '개성적 판단에 기초한'소비를 한다. 가장 개성적 상품을 소비했는데 몰개성한 인간이 되었다고? 이런 기가막힌 상황이 또 어디에 있는가. 또한 소비에 있어 남이 사니까 나도 산다라는 말은 언뜻 보면 멍청한 행동 같지만 사실 가장 안전한 방법이기도 하다. '남이 사니까'라는 말 속에는 남이 써보고 실제로 효과를 보았기 때문에 라는 훨씬 긴 판단이 축약되어 있는데, 이것이 다소 게으른 방법인 것은 사실이나 꽤 효과가 입증된 방법인것도 사실이다. 또 이런 과정은 상품의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르기에 상품소비 일반을 몰개성이다 개성이다 나누기도 어렵다. 의류소비와 분유소비가 같을 수는 없다.
어쨌든 소비의 결과만 놓고 봤을때는 결국 우위를 지닌 상품이 대세를 장악하기 마련이다. 어떤 이들이 보기에는 이것이 위에 언급한 트윗처럼 몰개성적 소비패턴 혹은 우매한 대중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애플의 아이폰이나 삼성의 갤럭시 S를 소비하는 것이 그 사람의 몰개성을 나타내는 것이고 다양한 제품군 속에서 각자가 다른 제품을 사는 것만이 정말 개성의 표현일까. 그렇게 따지면 그 개성넘치는 서구사회에서의 판매율 1위 제품들은 이미 시민의 개성들을 말소시켰을 것이다. 캠벨수프 먹고 다 똑같은 미국인 되고 테스코 사용하며 똑같은 영국인 되었겠지. 소비가 개성-몰개성의 판단을 불러오기 위해서는 '소비를 통해 개성을 실현한다'는 의식이 명료할때만 가능하다. 소비의 목적이 개성의 실현이 아니라 편익의 추구이며(물론 개성의 실현도 편익의 추구에 들어가긴 하겠다) 상품생산자 스스로 이 상품이 당신의 개성을 실현해준다!라고 어필하고 있다면 몰개성적 소비라는 비판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걸 쓰면 다른 이가 된다고 해서 썼더니 이젠 남들 다 쓴다고 몰개성적이라니.
무엇보다도 이 질문을 계속해서 밀고 나갈 경우 드는 의문은, '소비가 몰개성적이다'라는 언술 속에 어쩌면 '자신의 개성은 상품으로 표현해야 한다.'라는 말이 숨겨져 있는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물론 소비사회에서 우리 개성의 대다수는 어떤 브랜드를 소비하느냐에 달려있는 게 현실이다.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소비가 개성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 우리의 개성이 소비패턴과 직결되지도 않는다. 패션으로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더라도 생각에 아무 색깔이 없는 이가 있고, 똑같은 휴대폰을 쓰더라도 나름의 개성을 지닌 자들이 있다. 맨날 어디선가 본 거 같은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내 친구들은 그 누구보다도 개성적이다.
과연 개성적 소비가 개개의 색깔을 강화시켜줄 수 있는가? 역설적으로 '지금의 상품소비는 몰개성적이다'라는 비판은 그 이면에 '개성적으로 소비해야만 개성적이다'라는 전제를 깔고 '보다 개성적이고 다양한 상품소비를 가능케 해야한다' 혹은 '상품선택의 권한을 넓혀달라'는 대안으로 귀결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제한된 시간과 제한된 자본을 가진 대다수의 이들에게 상품소비의 폭넓은 선택이란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을까? 무엇보다 상품소비에 자신의 개성을 맡기는 짓이라니..이것만큼 한심한 인생이 또 어디있단 말인가. 어쩌면 진정 개성적이기 위해 중요한 것은 소비의 다양성이 아니라 소비하지 않아도 생활하고 표현할 수 있는 어떤 영역을 만들어내는 데에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그건 뭐 복지로 마련되는 기본교육의 장일수도 있고 공동체 원리에 입각해 운영되는 장일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이 세상이 자본주의 경제인 한. 그 장 내에서도 소비를 통한 개성 실현은 계속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니 고민을 또 해봐야 할 문제긴 하다.
사실 모든 이들이 개성적이어야만 한다는 말도 내게는 일종의 강박처럼 느껴진다. 모두가 달라야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인디언들 먹던 옥수수도 아니고, 종 다양성을 위해? 그냥 인생의 어떤 순간들은 좀 편하게 살아야지 내가 구매하는 상품에까지 나를 일일히 투영하고 항상 남과 다를려고 해서야 그게 어디 사람 사는 삶일까. 나는 보다 다양한 선택을 이야기하는 자들에게 요즘은 정말 서동진 교수의 말처럼 '선택하지 않을 자유'를 말하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먹는 음식에서까지 나의 개성과 정체성을 뽑아내려는 지독함은 기업이나 비판자나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당신은 멋져집니다' 라는 기업의 말과 '한국사람들의 소비는 몰개성적이다.' 라는 말이 목표하는 바가 뭐 그리 얼마나 다른가 싶다. 오히려 이들의 대척점에 있는 말은 '내가 뭘 사건 말건 그게 뭔 상관이야'라는 비웃음일 것이다. 차라리 기업은 그 개성있는 상품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많은 것을 투자하기라도 하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비의 대안은 소비일수밖에 없다는 이 세상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소비의 몰개성을 비판하는 '진보적'으로 보이는 주장도 벗어날 수가 없다는 점이 흥미롭다. (자신이 개성적이고 싶다면) 선택하지 않아도 소비말고도 개성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줄 수는 없을까. 사실 내 주변에 이런 이들이 많다. 소비를 거부하고 뭐 이런 이들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소비하느냐에 상관 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나름 유지하는 이들 말이다. 나는 어차피 소비로만 가능한 세상에 소비 자체를 모두 거부하는 것 보다는 이런 방향이 더 지속 가능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들을 어떤 식으로 모델화할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또, 그것이 일반적인 방법이 될 수 없고, 남에게 쉽게 권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