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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시절/영화/공연

[2012] 뱅뱅클럽

뱅뱅클럽

감독
스티븐 실버
출연
말린 애커맨, 테일러 키취
개봉
2010 캐나다, 남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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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의 시대. 사진의 힘


 현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시각 이미지” 일 것이다. 우리가 태어난 시대가 티비,사진이 일상화 된 시대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곤 하나, 인류 역사상 이렇게 시각이 강조되고 활용 된 적은 없었다. 실제로 유명한 미디어학자인 마샬 매클루언 같은 이들은 시각의 대두는 현대에 와서 일어난 일이라는 분석을 해온 바 있다. 시각 문화 이전의 문화는 듣고,외우고,쓰는 문화라는 것이다.


 뉴스라는 것 또한 인쇄술이 발달하고 언론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기관이 생겨난 현대의 산물이긴 하지만, 사진술이 많이 발달하지 못한 시기의 18~19세기의 언론과 현재의 언론은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뉴스는 여전히 말과 글을 중시하지만, 실제로는 잘 쓰여진 한편의 글 기사보다 순간의 현실을 포착해낸 사진기사가 훨신 힘이 강하다. 그 생생함과 압축적인 이미지 덕에 훨씬 사람들에게 많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훌륭한 보도사진들이 많은 찬사를 받고, 많은 사진작가들이 자신의 사진이 진실을 알릴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임한다.


 그러나, 순간을 있는 그대로 포착해야 하는 사진의 특성 상. 사진기자란 항상 윤리적인 질문에 직면한다. “사진을 찍기 위해 개입해서는 안된다”라는 기자로서의 룰을 너무 중시하다가 인간으로써의 도리를 소홀히 한 게 아니냐. 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급박한 사고의 현장을 정확하게 찍어낸다면 좋은 보도사진이 되겠지만. 그 이전에 한 인간으로써 현실에 '개입'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런 딜레마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영화 “뱅뱅클럽”이 다루고 있는 케빈 카터의 사진일 것이다. 바로 우리가 아프리카의 기아 라고 하면 떠올리는 그 유명한 사진 말이다.




<케빈 카터에게 1994년 퓰리쳐 상을 안겨준 보도사진. 이 사진은 '사진기자의 참여와 윤리'라는 점에서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촬영은 윤리적일 수 있는가?


 상상마당에서 상영 중인 영화 “뱅뱅 클럽”은 그 케빈 카터를 포함한 네명의 종군기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케빈 카터. 그렉 마리노비치, 켄 오스터브룩, 주앙 실바로 이루어진 이들 멤버는 90년대 초 남아프리카공화국 분쟁 당시, 진실을 포착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물불 안가리고 뛰어들어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들을 “뱅뱅클럽”이라고 불렀다. 영화는 이들이 남아프리카와 수단을 넘나들며 오가는 총성과 언제 당할지 모르는 사고의 와중에서 행한 취재활동들을 나름 스펙터클하게 각색하여 보여준다.


  이런  긴장감 있는 모습들 속에서 영화는 관객들에게 몇가지 윤리적인 질문을 던진다. “본다면 바뀔 것인가?” 혹은 “사진기사는 급박한 상황 속에 어떤 것을 우선시 해야 할 것인가?”  등등. 영화 속에서 케빈 카터는 “나쁜 걸 보면 찍어서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긴다”라고 말하고, 또 그들은 자신들의 사명감을 충족시키려 사진을 찍지만 실제로 그들의 사진을 두고 돌아가는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다. 그들이 보도한 사진으로 인하여 공격받는 진영이 생기기에, 한편에서는 그들을 파파라치, 혹은 하이에나라 비난하고. 그들 자신도 자신들이 하는 일의 딜레마에 끊임없이 직면한다.






 실제로 영화 내내 그렉 마리노비치는 린치당하는 흑인을 그저 “찍을 뿐”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나중에 그는 학살 피해자들을 찾아가 촬영 하는 과정에서 조명이 어두워 사진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며 툴툴거린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상황은 종군기자들이 피땀을 흘려가며 찍은 사진들로 인한 것으로 변하기 보다는 국제관계 질서와 내부 세력들의 합의로 급변하고, 그들의 활동들은 “하이에나”거나 “흑인의 시체를 찍는 백인”이 될 뿐이다. 이들이 영화 내내 겪는 딜레마들은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이자 평론가였던 수잔 손택이 자신의 저서 <타인의 고통>에서 이야기한 다음의 말을 상기시킨다.


“사람들이 사진을 통해서 뭔가를 기억한다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사진만을 기억한다는 데에 있다”


  기자들의 사명감들과는 별개로, 사진들은 현실 그 자체를 알리기보다 자극적인 정보로만 활용되고 사람들은 ‘사진만’을 기억한다. 그리고 기자들 스스로도 그 사명감 만에 충실하기보다는 케빈 카터의 사진 속 독수리처럼 무언가를 노리고 기다리는 존재가 되어간다. 극 중 뱅뱅 클럽의 멤버인 주앙이 “반란군이 없어져서 파리와 난민만 있어 찍을게 없다”라고 불평하는 모습은 그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영화 속 대규모 시위의 와중에 총소리와 뱅뱅 클럽의 셔터소리가 반복되는 것은 마치 그들의 촬영 또한 공격에 불과하다는 비유 같아 보이기도 한다


-참여와 촬영의 사이에서


 그렇다고 사진기자가 자신의 일을 저버리고 인간의 윤리만 다할 수도 없을 노릇이다. 사실 그 두가지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동료가 죽는 상황에서도 동료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남기는 뱅뱅 클럽 멤버들의 모습은 증오스럽거나 한심하다기보다는, 사진을 찍어서 알린다-라는 그들의 행위가 그들로써는 가장 윤리적이고 올바른 행동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느끼게 한다. 그들은 촬영함으로써 비로소 윤리적인 존재가 된다. 그러나 세상이 요구하는 "참여"의 윤리와 "촬영"의 윤리는 사실 크게 분리 된 것이 아닌데도 이 둘을 합치시키기란 그리 녹록치 않다.  무엇보다 문제는 그런 과정들을 케빈 카터가 그랬듯이 자살하거나 미치지 않고 계속 해나갈 수 있느냐, 윤리적 문제에 나름의 어떤 답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일 것이다 . 


 <뱅뱅 클럽>은 그 모든 딜레마를 심도있게 다루려 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시각의 시대에 우리가 하나의 진실로서 당연히 여기는 "사진"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것이 담는 모순들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 해 준다. 더군다나, 그 윤리의 딜레마가 어디 사진기자에게만 해당 되는 문제겠는가. 누군가나 자신 나름의 삶을 사는 "윤리적 방법"을 가지고 있는 세상에서, 흔들리거나 미치지 않고 그 방법을 고수 할 수 있는 길은 있는 것일까? 자신의 방식에 대한 외부의 반응에 무심해지거나. 혹은 그 방식 자체를 포기하는 극단적 방식 사이에 있는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종군기자의 딜레마는 남 이야기 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