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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

비평의 가능성.





http://tenasia.hankyung.com/archives/159445



<슈스케5> 현장예선에서 심사위원들이 참가자들에게 해준 구체적 심사평이 훌륭했으며. 그들의 앞으로의 심사평들이 구태의연한 슈스케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요지의 기사. 

  구체적으로 따지면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비평이 왜 중요한가 하는 이유가 이 기사에 나와있다고 생각한다. 좋다. 나쁘다. 감동스럽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그러한지. 그 중 우리가 미처 못본 것은 무엇인지. 우리가 깨닫지 못한 영향은 무엇인지. 이 모든 것을 풀어내는 것이 비평의 역할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해본놈이 잘 안다'로 대표되는 경험주의가 일반적 상식인 세상에서 각종 비평들은 관심을 받지 못한다. 슈스케의 심사평이 호평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기본적으로 일가를 이룬 가수이기 때문이다. 임진모가 나와서 한다고 생각해보면 그 차이가 명확해진다. 

 허나 대부분의 비평은 작가. 감독. 가수가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비평들은 '그럼 니가 만들어봐'라는 원색적 비난에 쉽사리 노출된다. 그러나 비평은 '창작자의 의도는 이래'라던가 '내가 더 잘 만들수 있어'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 느낌에 합리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창작자가 의식하지 못했으나 시대상 담기게 된 것들을 말해줘야 한다. 그리고 창작자가 의도치 않았던 영향들이 왜 발생했는지를 이야기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창작자가 이렇게 해줄수는 없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을 해낼 수 있기에 비평의 말과 글 또한 훌륭한 창작이다. 물론 작품 후에 발생한다는 점에서 최초의 창작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사실 그리 따지면 최초의 창작이란 대체 무엇이 있겠는가. 

  잘 쓰여진 비평은 뜬구름 잡는 막연한 느낌을  세계와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땅에 발 딛은 생생함으로 만들고, 상대를 각성시켜준다. 그런 점에서 작품만큼이나 훌륭하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비평 없는 세계란 자연현상에 대해 종교적 이해만이 존재하는 세계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나는 현재의 비평 전반을 다 옹호하자는 것도 아니며 그리 비평들을 많이 알지도 못한다. 그리고 내가 읽어봤던 얼마 안되는 몇개의 비평들은 위에 열거한 미덕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도대체 학문적 비평이 아닌 대중소설의 비평들이 왜 그리 대중적이지 못한 것인가?) 만약 모든 비평들이 그렇다면, 현재의 비평들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비평 없이도 모든 작품이 이해 가능하다 믿는 것. 그리고 그것은 의미없는 일이라 생각하는 요즘의 분위기에는 결국 반대할 수밖에 없다. 현재 비평의 양상이 문제될지라도 비평이 의도하고자 하는 것과 그 존재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비평은 필요없다는 말들이 우리에게 더 의미있을수 있는 것들을 그저 좋고 나쁨의 막연한 안개속에 던져놓는 무책임한 생각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