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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

김수환 교수의 미생 비평 / 김성근 감독 인터뷰

<미생>이 판타지라고? 아니, '불가능한' 성장 소설!

아래는 본문 발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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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와 같은 삶의 양태의 배후에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구조적 사회변동과, 그에 따른 생활세계의 리듬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른바 '포스트' 세계의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자본주의의 탄생과 함께 일반화된 전형적 패턴인 노동과 여가, 공장과 집의 엄격한 구분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포스트 자본주의의 체제는 '어디에서건 일해야 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아무 곳에서나 일할 수 있는' 사람들 또한 만들어낸다.


<미생>이 그리는 세계가 성과주의와 노동중독 사회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결여하고 있으며, 나아가 그것을 긍정적으로 미화하고 있다는 지적은 충분히 가능하다.(<미디어 오늘> 기사 ☞바로 가기 : "'미생', 장그래가 말하지 않는 것들: 성과주의 노동중독 사회의 쓸쓸한 단면") 혹은 약간 각도를 바꿔서, <미생>을 이른바 "기업 사회" 혹은 "기업가적 주체"의 한 버전이라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회사 생활'을 '삶 그 자체'의 축소판(환유)로 그려내는 <미생>이 그와 같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막상 그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은 결코 '자기계발'이나 '경쟁'의 논리가 아니다. 게다가 그것은 기업의 논리를 그것 바깥의 삶 속으로 가져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바깥의 논리(가령, 바둑)를 기업 속으로 투사하는 이야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절대 다수'(이 경우엔 진짜 절대 다수)가 그와 같은 '외부 없는' 노동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 자체는 결코 가볍게 넘겨버릴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은 '미생적 세계'의 보편성과 관련한 극히 중요한 '또 다른 지점'을 곧장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대중들이 <미생>에서 그려진 리얼한 노동세계에 열렬히 반응했다고 썼다. 그러나 과연 <미생>을 향한 그와 같은 반응의 원인을 노동하는(혹은 노동뿐인) 삶의 전면적 조명에 국한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그게 전부였다면 <미생>은 '잔혹 서사'의 미덕(예컨대, 현실을 되비치는 뼈아픈 거울의 의미)은 지닐지언정, 결코 '공감 서사'의 경지에는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현실의 적나라한 묘사를 공감으로 끌어올리는 포인트는 따로 있다. 그건 <미생>의 인물들이 이런 출구 없는 노동 사회의 현실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가능한 의미'를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핵심은 노동사회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태도,' 피로 자체가 아니라 그 피로의 '의미'에 놓여 있다.


사실상 두 번째 주인공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작품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오 차장에게 주어진 다음의 두 대사는 이런 사정을 간명하게 요약한다. 첫 번째는 작품 속 안영이가 말하는 오 차장의 캐릭터다.


"마치 메소드 배우같이 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분 같아요."(53수)


메소드 배우란 "작중의 인물이 되기 위해 자신을 지우고 극 중 인물이 되어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물"을 말한다. 그는 "그 후유증으로 종종 우울증에 걸리거나, 작품이 끝난 후에도 그 극 중 인물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53수) <미생>은 우리 시대의 일중독자인 이 '스타니슬랍스키적 주체'가 결국 완벽한 동일시에 실패하여 조직을 나오게 되는 이야기다(스타니슬라프스키는 '메소드 연기'를 창안한 러시아의 연극 연출가이자 이론가로서, 배우가 극중 역할에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켜 사실상 그 역할을 '살아낼 수' 있도록 하는 연기방식을 제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일에 너무 진지하게 임한 나머지 조직 내에서 곤경에 처하게 된 오 차장은, 장그래 앞에서 이렇게 읊조린다.


"나는 왜 일에 의미를 부여했을까. 일일 뿐인데."(138수)


분명히 말하건대, 여기서 방점은 오 차장의 '실패'가 아니라 일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그의 '의지'에 찍혀야 한다. 윤태호가 그리는 세계는 한 일중독자의 실패가 아니라 어떻게든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려 했던 의지의 분투를 향해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이 묻고 있는 질문은 '당신은 왜 일 따위에 의미를 부여하는가'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 당신은 과연 제대로 살 수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내가 보기에, <미생>의 핵심적 질문을 이렇게 요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럴 때에야 비로소 그가 말하는 다수의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실체를 좀 더 분명하게 떠올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 다수의 존재란 삶의 거의 전부를 잠식하고 있는 노동의 일상 안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기를 원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윤태호의 관점에서 보기에) '나머지' 사람들이다.


어떤 의미의 나머지인가? 먼저 노동에 의해 아예 삶 전체가 송두리째 '집어 삼켜진' 사람들(다만 죽지 않기 위해 일해야 하는 자들)을 제외하고, 그 다음엔 노동을 '거부'하거나 그 노동의 체계 바깥으로 '탈출'한 사람들, 혹은 애초부터 노동 바깥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자들을 제외하고 나서 얻게 되는 나머지다. 비유하자면, '호모 사케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틀비'나 '개츠비'도 아닌 사람들, 이도 저도 아닌 중간지대의 '무표화' 된 인간들이다.


그들은 노동의 무대와 시간 속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기를 원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여전히 그에 '붙들려' 살아간다. 혹은 다르게 말해, 그들은 '마냥 이렇게 살아도 좋은가'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 바깥을 상상하거나 그로부터 벗어날 결단은 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미생>이 말을 건네는 대상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며, <미생>의 호명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사람 역시 바로 그들이다. <미생>의 새로움, 혹은 보편성의 지점은 바로 이 '중간적 주체'에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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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바둑판 위에서 우리 모두는 미생에 불과하다'는 이런 인식은 '단단했던 모든 것이 속절없이 녹아내리는' 오늘날의 세계감각에 적절히 호응한다. 이른바 '불안정성의 시대,' 안전하고 확고한 것은 어디에도 없는 이 시대에, "어깨를 짓누르고, 입을 틀어막으며 땅 끝 무저갱으로 이끄는 삶의 짐"(3수)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와 같은 '미생의 논리'는 부사장 승진을 앞둔 전무에게도, 주어진 업무에 최선을 다하며 일다운 일을 해보려 했던 오 차장에게도, 어떻게든 '미생'(계약직)의 상황을 벗어나려 몸부림쳤던 장그래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미생>의 세계를 '적대'가 사라진 균질적 세계에 관한 보수주의적 멜랑콜리로 읽어야 할까? 그건 구조와의 정면대결을 우회하는 생활세계의 옹호, 현실을 담보로 한 '바둑판(체제)의 인정'에 불과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라는 물음과 함께 이 대목에서 필요한 것은 <미생>의 서사를 바라보는 '두 겹의 시선'이다. 오 차장과 장그래의 도전과 실패는 서사의 외적인 틀을 이루는 뼈대에 해당하지만, 실은 내부를 채우고 있는 '진짜 이야기'(즉 내부서사)는 따로 있다. 내가 보기에 <미생>의 진정한 서사적 핵심에 해당하는 그것은 바로 '팀'이라고 표현되는 '공동체'의 문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에서 '시스템'과 '의미'라는 두드러진 두 항목을 '매개'하는 표면화되지 않는 진짜 핵심은 다름 아닌 '공동체'인 것이다. '체제 안에서의 의미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그러므로 이제 달리 물어질 필요가 있다. 회사라 불리는 일상적 노동의 공간 안에서, 그 삭막한 전쟁터에서 과연 공동체는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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렇다면 영업 3팀은 어떤 종류의 공동체인가? 이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먼저 생각해볼 게 있다. 오늘날 직장이라는 노동의 공간을 '공동체'라는 화두를 통해 사유하게 될 때 즉각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몇 가지 불편한 난제들이 그것이다. 생계의 수단인 일터를 일종의 '운명 공동체'로서 정체화하려는 시도는, 주지하다시피 신자유주의 노동력 착취의 일반적 전략이다. '회사를 가족처럼'이라는 슬로건에 대한 다음과 같은 냉소적 반응은, 분명 유머 이상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분위기 가족 같은 회사>는 <분위기가 족같은 회사!>"


하지만 여기서 간파해야 할 것은 이런 허울뿐인 슬로건의 공허함만이 아닐 것이다. 그런 냉소적 반응 뒤에 담긴 물음 자체의 무게를 파악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과연 우리에게 직장이란 단순한 밥벌이에 불과한가? 우리는 단지 월급을 받기 위해 일하는가? 정말로 그게 전부인가? 노동의 의미를 겨냥하고 있는 이런 물음들은, 우리 시대 노동의 현장과, 그 속에서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직결돼 있다.

여기서 이 물음들에 '그렇지 않다'라고 답하고 싶은 욕구, 밥벌이를 넘어서는 의미를 공유하는 공동체를 갖고 싶다는 열망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영업 3팀 이야기에 울고 웃는 대중의 반응을 그저 '달콤한 판타지를 통해 현실의 모순을 봉합해버리는' 이데올로기의 희생물로 파악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앞서 노동의 의미가 그러했듯이, 공동체의 불가능성은 주어진 조건일 뿐 당위의 명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볼 수 있다. 오늘날 노동의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 역설적이지만, 노동의 바깥에는 (아렌트가 노동과 함께 묶었던) '가정'이 존재한다.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해, 그 바깥에는 오직 '가정밖에' 없다.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이 잘 보여주듯이, 오늘날 대부분의 노동하는 주체들이 바라는 노동의 외부란 사실상 가정(에서의 시간)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생>의 독자들로부터 가장 열렬한 호응을 얻은 에피소드 중 하나는 가정생활(육아)과 직장생활을 병행하는 선차장의 이야기였다(21~22수). 소위 '직장맘'이 겪고 있는 애환과 고충을 리얼하게 그려낸 이 에피소드는, 성별과 연령의 차이를 넘어선 보편적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가 보여준 것은 가정과 회사 사이의 균형 잡기의 어려움만이 아니다. 내가 보기엔 의도치 않게 그것은 현실의 또 다른 측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건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직장과 가정 이외의 제 3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 삶이 직장과 가정이라는 이원적 폐쇄 고리 바깥을 전혀 상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평균적인 대중의 삶에서 회사와 가정 이외의 또 다른 '바깥'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일 바깥이 없다면, 그렇다면 노동 이상의 그 무엇을 '안쪽'에서 실현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가? 이 질문과 관련된 직접적인 사례 하나를 들어보기로 하자. 올해 초 한국의 한 진보적 인문·사회과학 전문 출판사에서 벌어진 일이다. "공동체 VS 회사"라는 구절로 집약될 수 있는 이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이 출판사의 주체들은 이제껏 자신들의 조직이 '회사'라기보다는 '공동체'이며, 자신들의 일은 '노동'이 아니라 '활동'이라는 인식을 공유했다. 그러던 차에 해고되는 동료를 보며 노조의 필요성을 느낀 직원들이 노조를 설립하고 사측을 '경영진'이나 '자본가'로 규정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사측은 그렇다면 '앞으로 회사처럼 해 주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운동의 대의(공동체의 논리)와 노동의 권리(회사의 논리)가 정면충돌한 이 유감스런 사태를 두고 한 평자는 "사실 우리 사회 진보의 진짜 문제는 대의를 천명하는 공동체만 있을 뿐 원칙을 지키는 회사가 없다는 것이다" 임재성의 '공동체와 회사'(<시사인> 기사 ☞바로가기)라고 논평했다. 한편, 해당 출판사의 편집자는 '활동에서 노동으로 돌아갑니다'라는 글을 통해 "일과 놀이와 공부가 분리되지 않았던 곳"에 대한 감상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일반적인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제 친구들만 하더라도, 정해진 시간에 딱 일하고, 나머지는 너의 여가로 보내는 게 좋지 않냐고 했지만, 제게 그런 분리된 삶은 맞지 않았습니다. 아니, 더 솔직하게는 맞는 것 이전에 그렇게 살기가 싫었습니다. 기왕에 일을 해서 먹고산다면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아니라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고 존경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었고, 실제로 그런 삶을 누리는 제가 행운아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렇기에 저에게는 모든 일들이 '노동'이기보다는 '활동'이었고, 제 자신이 확장되는 무엇이었습니다. 근대적인 교환관계인 노동으로 살기보다는 노동을 최대한 활동으로 바꾸는 삶, 그것이 저와 지금은 떠난 동료들이 함께 꿈꾸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가기 : 그린비 출판사 편집장 블로그)


▲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앙드레 고르 지음, 이현웅 옮김, 생각의나무 펴냄). ⓒ생각의나무
노동을 활동으로 바꾸는 삶, 회사를 공동체로 만들려는 시도의 이와 같은 실패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 시대 노동과 의미의 단절상황을 둘러싼 모종의 교착상태이다. '회사는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식의 편리한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작동되지 않지만 그것을 대체할 '계약 관계'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매뉴얼은 합의되지 않았다. 합의 가능한 새로운 원칙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대의로 뭉친 공동체는 종종 회사를 '넘어서는' 게 아니라 외려 그것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제공될 수 있는 대안이란 기껏해야 노동시간의 단축, 그 옛날 앙드레 고르가 주장했던 '이중사회론' 같은 것들이다. 인간성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공간에서 쓰는 시간을 가급적 최소화하고, 나머지 시간에 다른 공간에서 전혀 다른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주장.(프롤레타리아여 안녕>(앙드레 고르 지음, 이현웅 옮김, 생각의 나무 펴냄)) 이런 견해는 결국 노동 그 자체 안에서 일궈내는 의미는 포기하고, 그 '바깥'의 다른 시공간을 살리자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또다시 시스템의 안쪽과 바깥쪽의 문제, 삶의 준거와 바탕을 어디에 둘 것인지의 문제로 귀결되어 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여기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 그것을 정답으로 제시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어차피 시스템의 논리란 젊음의 순수한 "열정"마저도 새로운 착취의 전략으로 변질시켜 이용하기 마련이라고 비판하거나,(<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진짜 자유란 오직 과감하고 결정적인 '거절'의 결단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사고가 그러하다.


▲ <그을린 예술>(심보선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은 그런 찢김의 상태를 어떻게든 견디며 꿈틀대려는 시도, 시인 심보선의 말을 빌자면 "적어도 그렇게는 아니다"에 해당하는 몸짓이다. 그는 비판에 관한 푸코의 정의인 "그렇게 통치당하지 않으려는 기술(예술)"을 인용하며, 이를 "적어도 그런 식으로는 통치당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역량으로 풀이한다. 그에 따르면, 바로 그와 같은 "가까스로"의 몸짓이 동물화, 속물화, 노예화에 저항하는 인간적 장소를 제공해준다. "다만 살고 싶었다. '마지못해, 죽지 못해'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잘, 조금 더 자유롭게, 조금 더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라는 고백, 삶의 한가운데서 추구되는 이런 소박하고 생생한 꿈을 발견하고 지지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그을린 예술>(심보선 지음, 민음사 펴냄), 14쪽)

그렇다면 이런 "가까스로"의 몸짓은 어떻게 가능한가, 아니 최소한 우리는 그런 몸짓의 시도를 <미생>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앞서 지적했듯이,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가 새롭게 배워가는 가장 큰 항목은 이른바 "협력의 기술"이다. 다른 이들과 함께 일한다는 것, 팀의 일원으로서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가는 경험은 바둑세계가 가르쳐주지 않은 새로운 체험이다. 이 공동체의 문법이 일반적인 회사 생활의 그것과 미묘하게 다르다는 점은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가끔씩 열리는 "영업 3팀"의 부서 회식은 '인간적 친목'을 빌미로 한 '일의 연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중요한 대국 이후에 행하는 집단적 "복기"에 더 가깝다.

윤태호는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며, 그것을 제대로 수행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진짜 프로들의 팀을 그리려 한다. 그 세계의 슬로건은 한마디로 "일만 잘하자, 그리고 월급 받자!"이다. 그것은 가족 같은 공동체는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의로 뭉친 '연대'의 공동체인 것도 아니다. 그들의 관계는 속내를 터놓고 생활을 공유하는 솔직하고 끈끈한 어떤 것이기보다는, 차라리 공동의 목표를 위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장인들의 공동체, 즉 '작업장'의 모델에 더 가깝다.

소위 '작업장'의 모델을 '투게더'가 실종된 현대 사회의 대안으로 제시한 이는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이다. 그의 제안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그가 협력을 위한 조건을 솔직하고 투명한 자아들의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협력을 위한 효과적인 '가면 쓰기'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자기방어를 위한 은폐용 가면과 더불어 "더 일반적이고 사회적인 영역에 속하는 또 다른 종류의 가면이 있다."(<투게더>(리처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현암사 펴냄), 386쪽)


▲ <투게더>(리처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현암사 펴냄). ⓒ현암사
그가 "중성적neutral 특징을 지닌" 가면이라 부르는 그것은, "남자든 여자든, 키가 크건 작건, 뚱뚱하건 말랐건 모두 똑같은 가면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비인격적"이며, 인격의 처소인 얼굴을 가림으로써 그의 행동의 미세하고 생생한 표현들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신체적"이다. 세넷에 따르면, 이런 "가면"을 쓴 채로 함께 일할 때(즉 그가 말하는 "일상에서의 외교"를 실천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드러내거나 성격 규정을 하는데 집중"하는 대신에 "공동의 사회적 공간을 표현력이 풍부한 내용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투게더>, 390쪽)

그것은 "타자에 대한 단순한 공감sympathy이 아니라, 거리를 둔, 지성적인 감정이입empathy에 기초하며, 타자들과의 동일성이 아닌 차이의 조절과 이해에 기초한다."(<투게더> 12쪽) 그것은 노동도 활동도 아닌, 아렌트가 말한 "작업"의 힘에 뿌리내리고 있다.

세넷이 말하는 (장인적) 협력의 기술은 결국 작업장의 "리듬과 의례를 배운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기술 발달을 지배하는 것은 습관을 각인시킨 결과로서의 '리듬'이며, 반복 연습을 통해 '몸'에 익혀진 그 리듬은 '의례'가 된다. 어떤 점에서 <미생>이 보여준 가장 커다란 성취 중 하나는 사무직 노동자의 일상적 노동에 깃든 이런 리듬과 의례를 이제껏 존재했던 그 어떤 작품보다 박진감 넘치는 리얼함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미생>에서 그려지는 대기업 사무직 일상에 관한 꼼꼼하고 세밀한 묘사는, 주지하다시피 많은 이의 경탄을 불러일으켰다(독자들은 작가가 회사 생활을 전혀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사무직 노동의 대표적 의례라 할 수 있는 기획서/보고서 문제를 몇 회에 걸쳐 구체적으로 다루는가 하면(39, 58수), 전체 임원진을 대상으로 하는 PT 장면을 마치 생중계하듯이 보여주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86수에서 임원진 대상 프레젠테이션 준비과정의 묘사는 "발표자의 복장"과 "회사 로고의 위치"에서부터, "펜 색깔의 배치 순서, 음료의 취향, 사탕의 당도" 따위에까지 이른다.

이처럼 회사 생활의 각종 형식적 의례들 한 가운데에 놓인 인물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마치 '작업장의 노련한 숙련공들'처럼 일사불란하게 수행하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은, 작품 속에 몇 차례 등장하는 "뭐 그리 대단한 일들을 한다고…일일 뿐인데…"라는 대사와 더불어 묘한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이들의 일상 묘사를 '거대조직의 무의미한 톱니바퀴'가 아니라 '모두들 각자의 위치에서 두고 있는 처절하고 숭고한 바둑'("그래도 바둑이니까, 내 일이니까, 내게 허락된 세상이니까")으로 느끼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일상의 리듬과 의례들에 부여된 무게감이다.

세넷에 따르면, 기술을 쌓아나가는 리듬이 결과를 내기까지는 대략 '1만 시간'을 수련해야 하는데, 이는 대략 하루 네 시간씩 5~6년을 수련해야 한다는 뜻이다(이는 중세의 길드에서 도제가 일을 배우는데 걸리는 시간에 해당한다).

"여러 장인들은 '작업장의 의례'라는 것이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처럼 별일 아닌 듯이 들리는 말 뒤에는 이런 리듬이 있는 것 같다."(<투게더>, 323쪽)

윤태호는 이 리듬과 의례의 한 가운데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공동체적 관계(세넷이 말하는 "격식 없는 사회적 삼각구도")를 어쨌든 '가능한 것'으로서 그려 보인다. "영업 3팀"이라는 그 가능세계를 '판타지'라 말하는 대중의 반응을, 현실과 허구를 분별할 줄 아는 냉철한 판단의 미덕이라 부르는 대신에 바로 그런 세계를 원하고 꿈꾸는 대중의 깊은 '열망'으로 바꿔 읽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미생>은 우리 시대의 '사회적 텍스트'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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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차장이 새로운 일터를 꾸리고, 체제의 외부자가 된 장그래 뿐 아니라 내부자인 김 대리마저 그곳에 합류하는 결말은, 분명 <미생>의 서사가 가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일 것이다. 그들의 실패가 남긴, 혹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유일한 대안은 '다른 공동체'의 가능성, 단 하나뿐이다. 어떤 가능성인가? 각자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리듬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공동의 협력 속에서 실현시킬 수 있는 공동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그런 '다른' 공동체의 가능성이다.

다시 말하건대, 그 공동체는 일(노동)의 외부에서 자기 내면의 '진정한' 자아를 찾고 그에 '충실'할 것을 결단하는, 그런 종류의 '바깥'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나'가 아니라 '(실재하는) 타인들'을 만날 수 있는 공동체, 나의 일상적 일(노동)속에서 지금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되어갈 수' 있게 하는 공동체, 타인들과 '협력'하는 법을 배우고 그 속에서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다. <미생>의 작가 윤태호는 이도 저도 아닌 우리 시대의 '중간적 주체들'에게 묻고 있다. 21세기 한국에서 지금 이 순간, 그런 공동체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은 과연 어떤 모습을 띄고 있겠느냐고."

"<미생>은 더 이상 성장의 자리와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 세계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고 절박하게 그 가능성을 찾고 있는 텍스트이다. 자기 자신을 바꾸는 일과 세계 자체의 변화가 더 이상 한 인간의 성장서사 안에서 통일되지 못하는 시대, 포스트 리얼리즘 시대의 이 '불가능한' 성장소설은, 그러므로 '두 세계의 문지방'에 자리한 새로운 인간형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혹시 그와 같은 '새로운 주체'의 탄생 무대는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닐까? 이 물음은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시선을 또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한다. 세계와의 연결을 갈망하지만 그것과의 근원적 접점을 그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는 "근거 없는 존재들", 노동 내부에서의 소외가 아니라 아예 노동 자체로부터 소외되어 버린 내던져진 존재들이 존재하며, 스스로를 그렇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피로사회"와 "허기사회" 건너편에 자리하는 마지막 꼭짓점, 즉 "잉여사회"의 문제에 해당할 것이다.(<잉여사회>(최태섭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잉여사회는 기존의 프레임으로 온전히 포착되지 않는, 그래서 '유령'이나 '좀비'로서만 현상하는 (노동 바깥의) 잉여적 실존의 문제를, 21세기 한국사회가 만든 새로운 '주체성'의 모델로서 파악하고 그것이 갖는 함의와 가능성을 논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사회문화적 배경을 포함한 더 다양한 분석으로는 <논문선 1: 속물과 잉여>(김상민 외 지음, 지식공작소 펴냄)을 참조)

하지만 그건 <미생>과는 전혀 다른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런 다른 무대와 주체를 보여주는 한국의 대중문화 콘텐츠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관련 링크

2013년 3월에 미생에 관하여 작성한 글 : http://stringlife.tistory.com/143 

김성근 감독의 인터뷰 및 발췌 : 미생이 말하는 공동체와의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 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915498

▲ 선수단과의 소통 방법은?

- 색다르게 할 수 있는 성격도 아니다. 서로간에 얼마나 진실하게 살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이겨야 하고 선수는 만들어야 한다. 이 과정 속에 진실이 부딪혀야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 순간순간마다 나 스스로도 그 속에 파묻혀 살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