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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

[1010] 호의적 해석을 위하여.

  블로그를 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내 조잡한 취미 중 하나는 인상깊게 본 창작물에 대한 감상문을 쓰는 것이다. 재밌게도 이제는 그러한 일을 주마다 하고 있다. 담당하고 있는 프로그램의 모니터링 보고서를 매주 작성하는 일이다.


 화요일날 담당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방송을 하고 나면, 수요일 아침에 시청률 결과가 도착한다. 그럼 나는 그 통계데이터를 바탕으로 질적 리뷰 (이야기 구성은 어떠했는가, 인터뷰는 충분했는가, 내레이션과 음악은 적절한가)와 양적 리뷰(어느 구간에서 시청률이 급증하거나 급감했는가, 이유는 무엇이고 대안은 무엇인가)를 작성한 후 팀장님 승인을 받고 전체에 공유한다.


 그렇게 작성된 모니터링은 유기적인 한편의 글과는 다르다. 그것은 구성이 나눠져있고, 명확한 목적을 띄는 업무적인 글이다. 하지만 어떤 창작물을 가지고 왈가왈부 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둘 사이의 큰 차이는 형식이나 내용보다는 창작물을 대하는 내 태도에 있다. 아무래도 나와 직접적으로 얼굴을 맞대는 사람들이 만든 작품이니 만큼, 그냥 혼자 취미삼아 쓰는것과는 다른 자세가 요구되는 것이다. 좋은 점을 찾도록 노력하는 자세 말이다.


 업무환경에서 비롯된 소시민적인 자세이긴 하지만, 이런 태도를 1주,2주 지속하다보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비판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일정 수준 이상의 시각을 요구하기 때문에 비판만 하는 건 쉽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가장 낮은 수준의 태도란 마냥 좋아만하는 것이고 그 다음의 태도란 마냥 비판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아마 좋은 점과 나쁜 점 두가지를 다 볼 수 있는 태도일 것이다. 아무리 엉망진창인 작품일지라도 말이다. 이야기는 엉망일지라도 영상의 구성은 훌륭했거나, 영상은 별로였어도 내레이션은 좋거나. 지금까지 여섯편 정도 진행했지만 아무리 시청률이 낮고 이음새가 엉망인 편이어도 결코 단점만 있는 작품은 없었다. 물론 나쁜 작품의 좋은 점을 보기란 평범한 작품의 나쁜 점을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하지만 노력해볼 가치는 있는 일이다.


 물론 글 한편을 쓰기 위해서는 물론 여러가지 포인트를 가지고 산만하게 작성하는 것 보다는 한 포인트를 잡아서 쓰는 것이 훨씬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모두 다 고루 보는 것과 그것을 글로 연결하는 것은 별도의 훈련이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업무를 진행하면 할 수록 어떤 작품을 볼 때 좋은 점을 보도록 먼저 노력하고, 그 다음 비판점을 찾는 감상 태도를 가져야겠다는 다짐이 생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이것은 삶에 있어서도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어떤 이가 '이론가에게 단 하나의 윤리가 필요하다면, 최대의 선의를 가지고 상대방을 해석해줘야 한다는 것이다'라는 글을 쓰신 걸 본 기억이 난다. 긍정-부정의 관계와 명확하게 대칭되지는 않겠지만 위에서 말한 작품에서의 좋은 점을 삶에 있어서는 선의, 또는 나름의 합리성으로 바꿔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그 단어들은 상황과 관계가 처한 맥락이라고 좀 더 확대해석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어떤 이들이 행하는 부당한 행동이나, 자신이 당한 억울한 상황의 긍정적인 면을 찾아서 안심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러한 상황이 어떤 악마성이나 초자연적인 원인, 혹은 비합리성이나 멍청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과 나름의 합리적 의도,맥락에 의해서 발생했다는 가정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물론 그러한 이면들이 비판점을 묻어버려서는 곤란하다. 항상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신에게 선택받았다고 생각하며 모든 게 사랑으로 가득찼다 생각하는 광신자들의 기이한 긍정적 모습과 같아질 것이다. 하지만 후자에만 집중하지 않는 사고를 기를 필요도 분명 있다. 그게 우리가 무언가를 비판하고 만들어내는 데에 큰 힘을 길러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