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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

[12/5] 서울시 인권헌장 파행을 대하는 우리의 공허한 논리


 서울시 인권헌장 관련한 글. 요지는 차별은 합의의 대상이 될수는 없다는 이야기인데, 예시로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을 비판한 미국의 가수들이 극우파들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는 에피소드를 가져와 이야기 하고 있다.

 박원순 시장의 발언 이후 동성애 차별 금지는 합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이런 종류의 글들이 참 많이 올라오는데 그 글들이 내게는 뭔가 계속 불편하다. 무엇이 불편한가를 곰곰히 생각해봤다. 물론 나는 세상에는 합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들이 있고 싸워서 쟁취해야 한다는 말에는 공감한다.


 하지만 그건 우리편의 논리다. 000는 합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에서 주어에 무엇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공허해진다. 그 속에 '가족'이라던가 '남녀의 사랑' '신' '기도'등이 들어가면 이야기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호모포비아 금지는 합의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말은 대학교 1학년생의 의식화나 우리편의 사기진작에는 유용한 이야기이고, 개인의 윤리를 강화시켜주는데도 큰 힘이 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설득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나와 다른 이들과 부딪히며 실제 어떤 결과를 도출해야 하는 정치에서도 이 말이 유용할까? 아닐 것이다. 박원순에게도 별로 적합한 말이 아닐 것이다. 한 개인이 자신의 작품세계에서 자신의 윤리를 지켜나간 것은 물론 훌륭한 일이지만, 그것이 정치의 영역에서도 바로 직유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인권헌장 현장에서 난리를 친 극우파들에게는 이성애자 가족이나 호모포비아. 신앙 등이 그 대상일 것이고, '합의 불가능한 가치이기 때문에' 그 난리를 친 것일게다. 그런 마당에 "이런 가치를 어떻게 합의를 통해 결정하냐"라고 하면 저쪽도 할 말이 많아진다. 우리가 싸워서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저들도 수십년간 반복해왔다.


 물론 나는 극우파도 설득해서 대동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시민 전부가 참여하는 100% 합의를 만들자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표본수를 어떻게 잡은 상태에서, 누구와의 합의인가, 어떤 합의의 그림을 만드느냐 하는 것이다.합의를 거쳐야만 정통성이 생겨난다. 대부분의 정책에 있어 합의의 상한선은 아마도 극좌 혹은 극우를 배제한 설득 가능한 중도층 다수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 대부분은 개인의 지향으로서 호모포비아 혹은 차별금지의 지향을 갖고 있을지라도 그것이 정책으로 구현되고 헌장으로 발표되는 데에는 별 생각이 없을 가능성도 높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어찌되었던 특정한 종류의 '합의'는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전두환도 결국 장충체육관에 집합이라도 시켰던거 아니겠는가. 결국 박원순의 문제는 애시당초 잘 할 생각도 없던 일을 벌려놓아 사람들의 자원을 투자하게 만들어 놓고는 정세 판단을 그르쳐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 정치적 무능력과 용기 없음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