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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다] 구체적 인간 - 언더그라운드


언더그라운드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0-11-24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1995년 3월 20일, 도쿄의 지하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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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가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사건의 피해자들 인터뷰한 책. 이들의 인터뷰 말미에는 항상 옴진리교에 대한 피해자들의 생각들이 나온다. 그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대개 다음 중 세가지이다. 1.더 이상 관심없다 2. 보고싶지 않다. 3.상응하는 처벌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건 대부분 사형을 의미한다) 1,2도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이들은 마땅히 '사형당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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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밝히자면 나는 사형제도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인터뷰들을 읽다 보면내가 이들의 입장이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루키의 표현을 따르자면 '아무것도 다르지 않은 평범한 날'에 지하철을 탔다가 식물인간이 되거나, 죽거나, 몸이 허약해지거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이들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 중 다수가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이들에 대해서 '사형 시켜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정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피해자 중에는 심각한 피해를 입고서도 가해자의 처벌보다는 피해자들의 치료가 우선이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러한 마음이 평범한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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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편적인 원칙을 이야기할때 그것에 힘을 실어주는 것도 구체적 인간들일 것이고, 그것에 가장 대적하는 것 또한 구체적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성혐오 내지는 외국인 노동자 혐오와 같은 경우가 드는 구체적 사례란 대부분이 협소하거나 루머에 가까운 경우가 많아 이성적으로 논박이 가능하지만. 처벌이나 타인의 고통에 관한 논쟁이라면 우리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기 십상이다.

 다른 종류의 사례지만 나는 최근까지 사후에 화장을 해야한다는 입장이었고, 나와 내 가족 모두 그렇게 진행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어서 매장문화에 대해 심정적으로도 동의하지 않는 입장이었다. 그런 나에게 얼마전 외할아버지의 죽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첫 경험이었고, 나는 그 계기로 매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장례식 마지막 날 할아버지의 관이 화장터에 들어가는 것을 보며 나는 왜 사람들이 매장을 그렇게 오랫동안 선호해왔는지, 심정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화장을 해야 한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지만 매장과 화장에 대해서 적어도 쉽게 말할 수는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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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더 큰 원칙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형제도에 반대한다고 했을때. 그러한 인류애에 가장 거세게 반박하는 것은 사형제도의 통계적 유효성보다는 '피해자여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라는 제3자의 반박, 혹은 실제 피해자의 구체적 발언일 것이다.구체성이나 경험이 주장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보편적 주장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 사건을 겪어야만 할까? 그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구체성에서 벗어난 어떤 냉정함,객관성이 있기에 더 나은 주장이나 발상이 가능할 것이다. 겪어본 사람만이 어떤 주장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에게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을 상상하는 걸 포기하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겪어봤음에도 불구하고' 원수에 대한 사랑을 설파하는 보기드문 인간만을 칭송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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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려는 주장들이 구체적인 목소리와 인간에 의해 의문의 여지 없이 반박당할때, 그때는 과연 어떤 태도를 가지고 설득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 맞딱뜨렸을때도 그런 원칙을 고수하는 태도가 맹신인지, 아니면 합리적인 믿음인지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이런 태도 자체가 이시하라 쇼코가 사린테러를 지시했을 때 자기 마음속의 인간적 양심. 혹은 구체성을 무시하고 테러를 감행한 그 사람들과는 어떻게 다를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언더그라운드>를 읽으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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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는 별개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사건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와 분석,성실함은 그가 전하는 피해자들의 구체성만큼이나 중요하게 다가온다 그런 태도는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의 문제에도 일정 부분 유효한 것이며 이 책이 전해주는 가치 중 가장 큰 것이다.


 인간의 고통은 사이비 사회학. 혹은 저널리스틱한 서술을 통해 뭉뚱그려진 보편적 해석이 아니라 대체될 수 없는 개개인의 특별한 고통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 우리가 강력범죄,대규모 테러 등이 일어났을 때 매스컴을 통해 무의식적/의식적으로 강요받는 선-악 순진무구-악랄의 구도를 벗어나 피와 살을 가진 구체성을 띈 개별 사례들을 총합해내고 양자가 거울관계임을 파악하는 것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는 점. 그리고 어떤 그릇된 이야기에 사로잡힌 이들 (한국이라면 그것이 일베,여성혐오,외국인 노동자 혐오,국수주의 등이 있겠다)을 비웃기 전에 그릇된 이야기를 허무맹랑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 수 있는 힘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냐는 물음까지.


 물론 그것을 단순히 이야기의 싸움만으로 볼 수 있느냐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격렬한 갈등의 국면에서 이야기꾼들의 역할이란 정말 엄청나게 큰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사회에서 작가의 역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하나의 답을 주는 책이기도 하다.


아래는 인용. 인용하고 싶은 부분이 정말 많았지만, 작가의 이 말이 가장 이 책의 의의를 잘 나타낸다 생각하여 이 부분만 옮겨본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옴진리교 지하철 테러사건)이 사건을 보도하는 매스컴의 기본 자세는 피해자=무구한 존재=정의라는 '이쪽'과 '가해자=더럽혀진 존재=악'이라는 '저쪽'을 대립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쪽의 포지션을 전제조건으로 고정시켜두고 그것을 이른바 지렛대의 받침점으로 삼아 저쪽의 행위와 논리의 왜곡을 철저하게 세분화하고 분석해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호 유통성이 결여된 모멘트가 도달하는 곳은 항상 축소되고 패턴화된 논리이며, 혼탁함이 초래하는 무감각이다...'나나 당신도 조금만 사정이 달랐더라면 옴진리교에 들어가 지하철에 사린을 뿌렸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상황은 현실적으로(즉 확률적으로) 거의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애써 의식적으로 배제해야만 하는 것이 혹시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