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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시절/책

[2009] 폭력의 세기

20세기를 폭력의 세기라고 했던 한나 아렌트의 정의에도 불구하고 21세기 또한 여전히 폭력으로써 기억되는 중이다. 이 땅 바깥을 굳이 벗어나지 않더라도 지난 여름 전경 군홧발의 기억에서부터 평택 최루액의 기억까지 현재도 폭력에 대한 의문은 현재진행형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폭력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저항으로써의 폭력은 어떻게 정당성을 가질까. 폭력이 곧 세상을 바꿀수 있는 힘일까. 등등 극단적인 상황속에서 밖에 표출될수 없는 그 성격 상 폭력은 우리에게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던진다.


 인 간이 아직도 덜 진보되어서 이렇듯 폭력이 만연한 것일까? 그렇다면 어디까지 진보해야 이 기나긴 폭력의 역사가 끝날 것인가?라는 생각을 우리는 종종 한다. 한나 아렌트는 이에 대해 “바로 그놈의 진보가 문제다.”라고 지적한다 우리의 20세기가 무수한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은 우리가 덜 진보되서가 아니라 진보에 대한 미신적인 믿음 때문이라고. 합목적적인 이성과 진보에 대한 믿음은 폭력이라는 수단의 합리화와 기술 발달에 따른 폭력의 극단적 강화를 불러왔고 이러한 양태는 나찌에서 마오쩌둥까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사 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혁명에 대해서 느끼는 거부감중 하나는 그것이 가지는 고전적 이미지 중 하나인 혁명달성을 위한 맹목적 폭력의 모습에 대한 것이다-돼지같은 지주의 목을 따는 혁명분자는 그 정당성 여부와 상관없이 분명 우리 머릿속에 “사실 저 지주는 반동분자가 아닐지도 몰라..”라는 판타지를 자극한다.-반동분자의 숙청이나 혁명과정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폭력은 어느 관점에서 봐야만 다른 종류의 폭력보다 정당성을 가질수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서 우리는 자유롭기가 힘들다.


 소 비에트에 대한 열망,게르만 민족의 영광의 재현. 대동아 공영권 건설. 혹은 흑인민권사회 등등. 그것이 현실 가능한 것이건,반동적이건,진보적이건 간에 그러한 진보에 대한 열망과 목적에 대한 집착이 폭력도 불사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라는 점은 지난 시간들이 입증해준다. 그 폭력에 자기 자신조차 내던질 수 있느냐,타인에 대한 숙청의 도구로써 사용하느냐에 또다른 차이가 존재할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합목적적인 이상이 폭력성을 띌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20세기 이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지적해온,전혀 새삼스럽지 않은 이야기이다.


 거 기다 이 책이 쓰여진 60년대의 상황에서는, 그 열망이 지나쳐서 오히려 가장 맑스적인 사람들 조차도 세계의 변혁을 가장 비 맑스적인 방법으로써 꿈꾸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고 아렌트는 한탄한다. 인간이 세계를 변혁하는 방식은 노동이 아닌 폭력이며 세계는 자체의 모순으로 무너지는것이 아니라 폭력으로써 낡은 때를 벗긴다고 외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 렇다면 이런 무리수들,폭력에 대하여 아렌트는 반대하는가? 그녀가 초반에 얘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폭력의 구분이 아닌 폭력이 만연한 상황에 대한 진단일 뿐이다. 세계의 변화를 꿈꾸는 자들은 비폭력 원칙을 고수해야 하는가? 그녀는 폭력을 행사하는 쪽이 이성적 상태일때만 비폭력이라는 수사가 의미를 가진다고 분명히 이야기한다. 나찌나 스탈린 앞에서 간디가 힘을 쓸수 있었을까. 광주도청의 계엄군에게 비폭력을 외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을 것이다. 단, 저항으로써의 폭력이 정당하고 당장 유효하다 하더라도 결국 변혁에 대해 바라보고 있다면 폭력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분노라는 감성에 대해서 긍정하고 그것에 기초한 저항과 변혁의지로써의 폭력을 분명 긍정하지만 그것만으로 세상이 절대 바뀌진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제시하는 것이다. 폭력은 사용하는 상황에 따라 당장의 억압과 부조리를 끌어내리는 힘을 분명히 가지고 있지만 결국 변혁을 이끌어낼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집단 행동과 동의에서 나오는 “권력”이라고 얘기한다.


 그 렇다면 권력과 폭력의 관계란 무엇인가? 좌파던 우파던 기본적으로는 폭력을 권력의 본성으로 파악한다. 폭력을 독점한 합법적 조직으로 국가를 파악하는 베버나, 국가를 지배계급의 억압 도구로써 본 맑스에 이르기 까지 폭력은 그저 부차적인, 권력의 일부인데. 그것은 아마 둘 다 타인에 통제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같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의 보다 노골적 형태가 폭력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기 쉽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갈등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정부의 폭압적 공권력은 어떻게 봐도 우리가 베버나 맑스에게 찬탄할수밖에 없게 만들지 않는가?

 그 렇지만 잘 생각해보면, 사실 폭력은 그 의도가 돈을 갈취하기 위한 것이건, 저항이건 간에 상대가 “자신의 목적에 따라주지 않을”때에 발생한다. 권력을 동의에서 나오는 힘이라고 정의한다면 폭력은 지극히 권력과 대립적인 형태로 그 모습을 탈바꿈한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리자면 “권력과 폭력은 대립물”이며 “한쪽이 부재한 곳에 한쪽이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실 절대권력이건,자본권력이건 간에 피지배자의 동의하에 나오는 것이고 이 동의가 깨어질때 권력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은 폭력이라는 방식을 동원하기 시작 하는 것이 보통의 메커니즘이며 우리는 이를 권력의 본질이 폭력이다 라는 식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 렇지만 아렌트가 볼때는 그 순간 이미 권력은 대중에게 이전되었고 통제력은 유지되어야 하므로 잃어버린 권력을 메꾸기 위해 폭력이 등장하게 된다. (사실 “공권력이 남용된다” 라고 했을때 이미 공권력이라는 말은 그 맥락속에서 형용모순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폭력으로 남용되는 순간 이미 권력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다.) 그러한 폭력으로 인해 대중이 가진 권력은 무참히 박살나지만-박살날수밖에 없지만-그렇다고 해서 폭력이 권력을 창출해 내고 세계의 변혁을 이끌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런 측면에서 마오쩌둥이 말한 총구에서 권력이 나온다 라는 명제는 심각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 쉽다. 폭력으로써 이루어지는 변화는 시작점일 뿐이다. 폭력으로써 이루어진 통제력은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한,대상의 동의여부와 상관없는 지극히 불안하고 강압적인,실체를 가지고 있는 힘이 아니다. 사실 폭력적인 형태로써 통치를 오래 유지한 경우가 없다는 것.혁명하자고 사회를 일소해놓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역사의 기억들만 들쳐보아도 이 명제는 설득력을 지닌다. 어떤 형태의 권력이건 다수의 동의를 기반으로 하며-그것이 지배를 위한 헤게모니 장악의 형태이건,세계 변혁을 위한 대다수 인민의 민주주의의 발로이건 간에-이것이 권력의 본질이며 이것만이 변화를 이끌어 낼수 있는 것이다. 폭력은 사용 후에 정당화를 필요로 하며 권력은 시작할때의 모습에 따라 정당성을 지닌다.


 자 이렇게 저항하는 자에게 면죄부는 주어졌다. 저들의 폭력과 우리의 폭력은 다르다. 저들이 우리의 동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이를 탄압하기 위해 폭력을 쓴 순간 저들에게 주어진 권력은 이미 상실되었다! 그들의 부조리에 쿨한척 하지말고 분노하며 타인에 공감하며 저항으로써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 또한 순간일뿐 우리는 연대하고,모여서 정당한 권력을 창출해내서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이 책은 말한다.  결국 동의에 의한 집단의 힘=권력과 사회에 대한 감수성 내지는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라고도 할수 있는 공통감각의 복권이 아렌트가 제시하는 대안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부터 공감의 맥락이 흔들리며 문제가 발생한다.


 공 통감각의 복권을 아렌트는 해결되어야할 것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그 공통감각의 정당성은 무엇이 보증해주는가? 사실 무엇을 우리가 공감해야 할 감성으로 정하는 것 조차 무수한 권력싸움을 필요로 한다. 지금은 아동인권에 대해서 모두가 동의하지만 그 조차도 100여년 전에는 소수의 감수성에 불과했다.

 노 동자에 대한 고통의 감수성은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요원한 일인데, 한쪽에서는 이것이 공통감각의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공통감각 또한 권력끼리의 다툼을 통해서 획득되어야 할 무엇이며 그것이 항상 옳게 작용한다고 생각하긴 어렵다. 아렌트의 주장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선험적으로 주어지고 우리가 공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공감만으로도 권력의 형성조건은 충족되지 않는다. 우리는 타인의 감수성 이후에도 무수히 많은 용기와 공부와 행동을 필요로 한다.


 그 리고 단순히 권력에 동의에 기반하는 것이라면, 그 권력의 정당성은 과연 어디서 찾을수 있는가? 현대를 지배하는 자본권력의 힘은 분명 대다수 대중의 동의에서 나온다. 그렇지만 보드리야르 같은 사람들의 의문처럼 그러한 동의조차 허구적이거나 조작의 결과라면, 폭력의 세기에서 나온 한나 아렌트의 사유로는 권력들 간의 어떠한 질적 차이도 보장할수 없다. 이후의 저작들에서 어떠한 실마리를 주었을지 모르지만 폭력의 세기라는 텍스트 안에서만 고찰한다면 그렇다.


 동 의를 기반으로 권력이 형성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권력이 좋냐 나쁘냐는 차이도 분명 존재한다. 대한민국의 광신적인 애국자들의 집단행동으로 형성되는 권력과 여름날 수많은 사람들이 모임으로써 형성된 권력은 질적인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 중요한것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뿐 아니라 어떻게 작용하는가이다.

 사 실 이 책은 폭력의 세기라기보다는 원제인 on violence-폭력에 대해-가 더 정확하며 그 보다도 폭력과 권력이라는 제목이 훨씬 적합하지 않나 싶다. 그러나 이 저작에 있어 폭력의 세기에서 권력에 대한 사유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폭력에 대한 사유에 비해 가치판단을 보류하고 있거나 중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다.

 더 군다나, 아렌트가 설정해놓은 상황은 하나의 권력에 관한 예시가 많아, 사실상 수많은 “권력”들이 투쟁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폭력들의 양상에 대한 고찰은 읽는 사람의 몫이 될수밖에 없을 듯 하다.  사실 그때보다 더 다양한 권력관계들이 존재하고 더 다양한 모습들이 명멸하지 않는가? 권력이 동의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권력들이 한쪽으로 특정지을수 없는 비율로 나눠지거나 비등하게 나눠지는 상황에서 더 큰 권력도출로 나아가는 과정과 방법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