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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시절/책

[2009] 거대한 전환

 1.


 인 간이 인식할수 있는 시간지평이란 비교적 짧은 탓에 우리는 매번 지금 우리를 둘러싼 환경들이 역사가 장구하거나 혹은 인간에 본성에 기초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혹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 이 상황들은 장구한 역사의 선형적인 진보의 과정이라고 쉬이 믿어버리기도 한다. 페인트칠을 진짜 하늘로 알고 살았던 트루먼의 모습을 다소간 어느정도는 가지고 있는 것인데 사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은 의문투성이일수밖에 없다.


 정 말 역사는 선형적으로 발전하는 것일까? 우리가 자연스럽게 생각한 모든 것은 단지 그것이 우리와 동시대의 것이기 때문이지 전체적인 흐름에서도 자연스러운 것일까? 사실 몇년전까지만 해도 자연스럽게 여겼던 것들이 하나 둘 씩 무너지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는 것을 보고 있자면-그것이 이명박 정부의 지난 2년의 과정인 경우도 있지만-역시 세상에 “원래부터”라는 것은 없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 렇지만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차원이나 나가서 어떤 특수한 본성을 기반으로 하는,우리가 너무나 지극히 자연스럽게 여겨왔던 시장이라는 체제에 대한 것이라면 조금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것들 조차 허구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2.

 

 우 리가 가장 흔히 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말이 있다. 바로 "원래 이기적이니까"라는 말인데 이것은 사실 경제학에서 말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에 관한 것이다. 자신의 이윤에 대한 욕심이 행동원리가 된다는 것이 바로 이 모델의 핵심이다.

 

 근 데 우리가 예전에 배웠던 도덕이나 사회시간을 생각해보자. 도덕시간에 그 무수히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논하고,세상을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공리주의자들을 빼고- 사회나 경제시간에는 인간을 기본적으로 “이기적 존재”로써 가르치지 않던가? 그것이 그렇게 보편적인 본성이라면, 인간이 본디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고대의 철학자들은 모르고 있다가,역사의 진보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로 근대에 들어설 무렵에야 알았단 말인가?

 

 이 미묘한 균열에 대하여 칼 폴라니가 방대한 인류학 자료를 가지고 “거대한 전환”에서 말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에서 19세기를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인간이 자신의 경제적 이윤만을 원리로 삼는 사회를 가져본 적이 없고,그런 원리가 인간 행동의 제1동기가 되본적도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본디 이기적인 동물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시장이 사회 원리가 된 적도 없다. 오 히려 그 이전의 제1원칙과 고려란 정치적,사회적인 이유가 많았다. 그것은 자기조정 능력을 지닌 시장의 실현을 위해 강요된 롤 모델에 가깝다는 것이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요한 주장 중 하나이고, 이러한 주장에 대한 논증을 기본으로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전세계적 시장경제”의 허구성에 대해서 논한다.



  사실 인류학 자료로 거슬러 올라갈것도 없이,우리의 삶을 한번쯤 봐도 인간이 경제동물이라는 원리는 그 설득력을 잃는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오로지 이윤획득만을 위해 이뤄지는가? 싸이질을 돈벌려고 하나? 직업선택에 있어서 출퇴근거리,사회적 위치에 상관없이 오로지 경제적 이윤만을 생각하면서 하는가?  물론 경제학자들중에서는 간혹 사회적 정치적 이유마저 “이윤”으로써 간주하지만 이는 본디 그 말 뜻을 벗어난,무리한 논리가 될수밖에 없다.

 

 그 렇지만 이것을 인간 행동의 모든 원리로 삼는 순간, 인간의 사회도 무의미해지고 실제 존재하는 다양한 고려는 “무지한 것”으로 떨어진다. 이것이 사실 모든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범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오류중 하나인데, 경제 요인 이외의 것들을 변수로써 취급을 안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이란 그저 실재 존재하는 타인에 대한 고려가 없는, 무한한 이기심이라는 괴물같은 본성을 지닌 기묘한 존재로써 정의된다. 그렇지만 폴라니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인간은 결국 사회속에서 어우러져 사는,결코 이기적이기만 하지 않은 영혼을 가진 존재이며, 중요한것은 어떠한 측면을 사회가 끌어낼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본성에 대한 가정에서 시작한 시장경제를 사회적 원리로써 삼는것에서부터 재앙이 시작되었다고 진단한다.

 


 

3.


 케인즈가 시장경제를 선도,악도 아니라고 보았고 마르크스는 이를 악이라고 보았으며 미제스나 하이예크,그리고 지금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이것을 지고의 선이라고 본다고 했을때 이들의 공통 분모는 어쨌든 “사회적 원리로써의 시장경제는 현존한다”와 “사람들은 경제적 동기에 따라-그것이 계급이건 개인이건-움직인다”라는 전제에 의존한다.

 

 그런데 폴라니의 입장은 시장경제 자체가 현실에 실현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며, 인간의 행동동기는 경제적인 것 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종류의 시장거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전 지구적인,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로써 받아들여지는 시장경제라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시작 하려고 하면 붕괴할수밖에 없는 아킬레스건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계급에 대해서도 그것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 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기조정 시장경제 아니냐고 반문한다면,아마 폴라니의 답은 그런건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 21세기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도가 될 것이다. 자기조정의 유토피아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결코 존재할수 없다. 만약 계급투쟁이 중요하다고 반문한다면 폴라니는 사회의 흐름에 부응하는 계급투쟁이 유의미하다고,중요한건 계급이 아니라 사회라고 말할 것이다. 폴라니가 봤을때 시장경제는 무수히 많은 조정과 간섭이 있지 않으면 자기의 골수까지 파먹으며 스스로 파멸하는 존재이며, 이것을 막는 것은 특정 계급의 정의로움을 통한 것이 아니라 전 사회의 자기보호기능으로써 가능하다.

 

 즉, 노동자 계급이 파괴적 시장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것은 그 계급이 정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의 자기보호요구에 부응할수 있느냐 없느냐에 좌우되는 것이고, 그것은 지주계급이나 자본가계급이 될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 장경제의 허구성에 대해서 다시 얘기해보자면, 자유주의자들이 시장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얘기했던 시장경제의 근본으로 올라가 보더라도, 폴라니가 드는 무수한 예를 통해 물물교환의 불편함에 의해서 시장이 점차적으로 확장되고 화폐가 발달되었다는 말 조차 거의 곰이 웅녀가 되었다는 수준의 허구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우리가 배웠던 사회시간에 마치 시장은 역사를 거치며 점차적으로 발전해왔다고 가르치지만 이는 신화와 전설이 가진 특정한 종류의 상징성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시 장경제는 동네시장에서 전국시장,국제 교역으로 점차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고 서로의 유무와 무관하게 전국시장은 거의 국가의 강제에 의해서 발생했으며,동네시장과 국제교역은 작든 크든 따로 분리된 상태에서 존재해 이들 사이의 선형적 연관성이 전혀 없다는 점, 경제학이 슬슬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중상주의 시절 조차도 전국시장이나 국제교역이란 시장이데올로기의 발현이 아니라 전국적 규제의 판이었다는 사실 등이 자유주의자들의 신화를 마구 파괴한다. 시장은 자생적으로 발전해온 것이 아니라 각기 특정한 목적으로,그리고 국가의 강제적 보조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런 허구성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시장경제가 마치 태고부터 내려온 지고의 선으로써 사회의 원리로써 자리잡게 된 것일까?

 

4.


 그 전에도 신세계의 발견,종획운동 등 여러 움직임들이 존재했지만 가장 결정적 계기를 폴라니는 산업혁명 시 기계의 발달에 따라 대량생산,대량소비의 필요가 떠오르면서 모든 생산요소를 상품으로써 다뤄야 하는 필요성이 부각된 시점으로 본다. 시장이라는 것이 그 이전에 없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로 등장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산업사회"가 아니라 "시장사회"인 데.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근간으로 한다고 쳤을때,여기에 투입되는 중요 3요소인 노동,토지,화폐를 건드릴수 없는 것으로 두면 안정적인 생산과 소비는 보장되지 않는다. 이들을 상품화 시켜 필요할 때 투입하고 필요할 때 빼내서 안팔릴땐 쉬고 팔릴땐 많이 써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서부터 폴라니가 말한 “허구상품”의 개념이 등장한다.


 이 런 허구상품의 원리가 폴라니가 예로 든 18세기 스피넘랜드 법안-*.당시 실업자들에게 무조건적인 소득보조를 해주는 법안이었는데,이로 인해 노동에 대한 가치나 즐거움 등이 바닥을 치고 기층민 대부분이 도덕심 제로의 거지와 같은 상태로 몰락하게 된다. 노동시장의 형성을 막기 위한 법안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정말 예외적인 참혹한 결과를 불러와 리카도나 멜서스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자들의 득세를 불러온다- 의 참혹한 실패 등을 겪으며 자리를 잡게 된다.


 생 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노동,토지,화폐는 결코 상품이 될수 없는데 이를 상품으로써 간주함으로써 심각한 균열이 일어나게 된다.  노동이란 인간의 다른 이름이고,토지란 자연의 다른 이름이며,화폐는 국가가 보증하는 교환권의 개념인데 이 셋을 “팔리기 위해 만들어진”상품으로써 간주하는 것이,그리고 그리해야만 돌아가는 것이 시장경제 유토피아라는 원리라는 것이다.


 이 렇게 모든 것이 상품이 되어야 수요공급의 그래프가 제대로 움직여 시장이 적절한 위치를 찾게 된다는 것이 이 유토피아의 골지인데. 너무나 익숙한 생각 아닌가? 우리는 노동 토지를 당연한 상품으로써 교육받아왔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은 보다 좋은 “상품”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5.


 

그 리고 이 모든 상품은 외부의 영향력에 간섭받지 않아야 하는 것이 시장의 전제가 된다. 간섭받는 순간 시장의 자기조정능력은 심각하게 붕괴할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 허구상품 세가지는 본디 상품이 아니기에 외부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 상품처럼 필요할 때 쓰고 필요할 때 버려질수 있는가? 토지라는 것이 필요할 때 생산되는 것인가? 화폐-정확히 말하자면 당시 화폐의 근간이 되었던 금-이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면 늘리고 디플레이션이 일어나면 줄일수 있는 것인가? 허구상품들은 결코 상품이 될 수가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를 기반으로 하는 시장경제 자체가 붕괴할수 없는 이러한 허구성에 기초한 제도라는 것이다.


 (근 데 조금 다른 얘기를 하자면, <거대한 전환>의 말미에 시장주의자들을 벙찌게 만드는 기가 막힌 논리적 모순이 등장한다. 시장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로 노동이 상품이라면 그 노동을 공급하는 노동자의 파업은 지극히 당연한 “판매자”의 권리이자 자기조정의 일환이 아닌가? 제값을 받기 위한 최적화의 과정이기 때문에 이것은 자유주의자들로써 존중해줄 수밖에 없는 권리가 아닌가-하고 말이다.)


 어 쨌든 이 허구상품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구성요소인 탓에 시장경제는 허구상품을 통해 인간사회 자체를 수요공급의 자기조정 시장 원리로 재편성 하도록 강요하게 된다. 그렇지만 원래 상품이 될수 없는 요소들인 탓에 이러한 강요에 대해 여러 곳에서 사회적인 반항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이 노동자들의 파업으로써 나타나기도 하고,사회주의로써 나타나기도 하며,중앙은행 설립이나,지주들의 발호로써 나타나기도 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파시즘도 이러한 시장경제의 파괴적 성향에 대한 사회의 보호작용으로써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하여, 인간의 19세기 이후의 역사의 흐름은 실현 불가능한 자기조정을 강요하는 시장에 맞서서 사회를 보호하려는 운동이 일으키는 마찰음에 의해 굴러온 것이라고 폴라니는 진단한다.


 자기조정 시장은 절대 존재할수 없다. 왜? 그것이 단 한순간이라도 존재하는 순간 인간,자연, 심지어 시장의 주요 기관인 생산수단까지 모두를 갈아마시고 종국에는 그 자신이 기반으로 삼고 있는 인간사회 자체를 파괴해 버린다. 그리고 그 잠깐 조차 국가의 보조와 강제를 필요로 하니 이미 그 배경조차가 자생적이지도,자기조정적이지도 않다.


 그 유명한 하이에크의 자생적 질서를 생각해보자. 이것은 간략하게 말하면 자기조정 시장의 그럴듯한 철학적 레토릭에 불과하다. 놓아두면 다 알아서 잘 하게 될것이라는 말은 언뜻 그럴싸해 보이지만 문제는 자생적 질서로 수렴하려는 과정에서 모든 사회가 풍비박산이 난다는 것이며 그 질서의 수립 조차도 인위적 조작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 순간 그것은 “자생적”이지도 않다.


 그 렇기에 자기조정이 발동하는 순간 그것이 어떤 형태이건 간에 사회의 전면적인 자기보호가 일어날 수 밖에 없고, 사회의 자기보호는 시장의 자기조정능력이라는 것을 침해하기에 시장의 기능은 그 힘을 잃어 붕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이것을 시장은 분명 "자기조정능력을 지닌다"라고 해석하면 곤란하다. 그것이 이론적으로는 존재할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이 폴라니의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의 핵심이다. 상상속에서 이를 끄집어내서 현실에 발을 붙이는 순간 그 자신이 무너짐과 동시에 발딛은 땅까지 무너뜨리는 괴물이 바로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유토피아라는 것이다.

 

이 러한 자기보호 기능은 “사회”라는 어떤 실체에서 일어나는 분명한 힘이며, 이것은 어떤 특정 계급이 이뤄낸 성과가 아니라 “사회”의 필요성에 의해 나온 힘이다. 폴라니가 볼때 중요한 것은 경제적 기준에 따르는 계급의 투쟁에 따른 승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의 요구에 부응할수 있느냐 없느냐가 된다. 경제적 착취의 여부보다 중요한것은 인간 삶의 터전인 “사회”를 파괴하느냐가 된다.


 일 례로 마르크스가 극찬한 “법적 노동시간의 고정”조차도 사회주의 운동의 승리가 아니라 실제로는 부르주아에 반대하는 봉건귀족세력의 협력에 의해 이뤄질수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운동이 폴라니가 든 자료에 따르면 단독 계급의 승리가 아닌, “사회적 요구”라는 틀로써만 설명될수 있는 이합집산을 보여준다. 계급이 사회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계급을 결정한다. 폴라니에게 있어서 운동의 단위는 계급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된다.

 

 노 동자가 파업을 통해 노동의 허구상품화에 대해 저항하고,그에 따른 임금상승에 따라 자본가는 돈쓸일이 늘었으니 돈을 풀어달라고 하며 화폐의 허구상품화에 대해 저항한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시장주의자들의 얘기처럼 전체주의자들의 집단적 음모거나 사회주의자들의 얘기처럼 노동자의 위대한 승리가 아니라,분명 조직되지 않은 산발적이긴 하지만 분명 일관된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그 렇지만 이러한 자기보호운동 조차 그것이 허구건 아니건 시장원리를 근본으로 삼게 된 사회를 파괴하는 행위로 귀결될수밖에 없기에 그 자신의 유지를 위해서 근본원인이 되는 '자기조정' 시장원리를 버리는 것으로 사회는 흘러가게 된다. 파시즘에 대해서 폴라니는 19세기 이후 자리를 잡은 개인에 대한 기계적 취급이라는 시장주의자들의 인간인식과 퇴행적인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이 결합되어 나타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진단한다.

 

이것이 폴라니가 진단한 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의 역사적 흐름이다. 그리고 향후 인간의 "자유"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 가가 인류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고 본다.

 

6.

 

 문명의 붕괴 이전까지 자유주의자들이 꿈꿨던것은 완벽한 개인으로써의 자유였다. 어떠한 규제도 간섭도 없이 홀로 존재하고 자신의 이윤에 따라서 움직이는 개인을 꿈꿨던 자유주의자들의 이상은 그것이 기득권의 옹호논리이건 어쨌건 간에 실제로  20세기에 그 종말을 고했다.

 

 홀로 존재하고 혼자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며,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 또한 없던 일일수밖에 없다고 폴라니는 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일정한 정도의 규제없이 세상은 결코 돌아가지 않는 다는 것을,그리고 인간세상엔 사회라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 자신들의 파멸과 문명의 파괴로써 입증해 보인 것이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것 같던 자유로운 자기조정 시장은 오히려 자신의 기반조차 갉아먹으며 아무런 해법조차 내놓지 못했으며 오히려 해법들은 자기조정을 포기할때만 도출되었다. 자기조정 시장의 가장 극단적인 모습들은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괴물의 모습으로 나타났고,이러한 오류를 깨닫지 못한 1차대전 이후의 전후복구의 노력이 결국 퇴행적인 사회보호운동을 불러 일으켜 그 갈등으로써 문명을 파탄지경까지 몰아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크게 두가지 선택항이 남게 된다고 폴라니는 말한다. 첫째는 규제라는것이 필요악이기에 규제받는 인간의 자유란 불가능하고 헛된 것이므로 이를 말소해야 한다는 파시스트의 길과 둘째는 인간세상에 대한 규제와 간섭이 우리가 감수할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통해서 자유를 실현할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사회주의자의 길이 있다고.

 

 자유란 꼭 규제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규제와 간섭이 우리의 자유를 침해할것이라 항상 두려워 하지만 우리의 목적이 확고하다면 그 규제와 간섭을 하나의 도구로 삼아 더 인간적인 세상을 만들수 있지 않겠냐는 말로 폴라니는 이 거대한 '논의'를 마무리 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마르크스처럼 낙관적이지도 않지만 하이에크와 같이 무책임하지도 않다. 노동가치론을 믿지 않고 부분적이나마 효용가치를 믿었으나-이것이 맑시스트들한테 주로 비판받는 지점중 하이기도 하다-그것이 사회의 구성원리가 될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사회를 강조하지만 사회가 자동적으로 안정으로 수렴한다고,모든 종류의 사회보호운동이 선하다고 하지도 않는다. 그에게 있어 사회는 시장경제를 물리치고 안정성을 회복하는 지고의 선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고민하고 끌어나가야 하는 역동적 실체이다. 시장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개인의 이익을 원리로 삼는 시장이데올로기가 사회의 원리가 되는 상황이 비정상적이고 비인간적이라는 말을 한 것이다. 인간은 더불어 사는 존재고,영혼을 가진 존재기에. 그게 어떤 좋은 목적을 가지고 있던 원리가 되서는 안된다고 폴라니는 외친다.

 

 그 자신이 <전환>의 집필을 끝냈을때 폴라니는 21세기가 이렇게 돌아갈거라는 상상을 했었을까? 아마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것 같다. 폴라니는 분명 책 말미에 이제 자기조정이라는 환상은 무너져 내렸고 새로운 세상을 이뤄나갈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다소 희망찬 어조를 보이지만,그가 죽고 난 뒤 불과 30년도 지나지 않아 자기조정시장의 망령들이 세계의 권력을 잡고 다시금 "시장은 위대하다"라는 말을 되풀이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망령이 지구상에서 가장 힘을 가지고 있는 이 땅에서 살고 있다.

 

 

7.

 

 21세기 대한민국 사회구성의 원리는 "모두 부자되세요"하나로 귀결된다는 우석훈 박사의 진단은 정확하다. 경제적 인센티브가 모든 행동을 규제하려는 상황에. 그리고 그 상황이 지극히 당연하고 우리는 모두 이기적이기에 외로울 것이라는 음울한 상황에 폴라니는 작은 균열을 내준다. 나 자신이 혁명을 꿈꾸는 혁명분자이거나,무엇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에 내가 받은 영감과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여 세상을 바꿔보겠다 하는 거창한 생각을 하진 않는다.

 

 다만 이 따뜻한 균열이 소시민적인 삶에 당장 무엇을 바꿔주진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이 미친 상황이 고래로부터 전해 내려온,우리의 본성에 기초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우리는 비록 지금 괴물일지라도 원래 괴물이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작은 안도를 해줄수 있게 해주고 작게나마 상상을 해볼수 있게 해줄 것이다. 당연한 것이 당연한것이 아니었다면. 저 태양이 사실은 조명등이었다면. 문을 열고 나가느냐는 자신의 선택이겠지만 그 허구를 알기 전과 후의 삶은 분명 작던 크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는 상상을 어찌되었건 해보기 시작한 삶 또한 작던 크던 달라질수밖에 없다.

 

 참고로 600페이지 내외의 방대한 분량이지만,사회과학 서적답지 않게 문체가 호쾌하고 구성이 역동적이며, 홍기빈씨의 번역과 각주도 훌륭해 왠만하면 누구나 쉽게 쭉쭉 읽어내려갈수 있는 책이다. 나 자신도 정작 책을 읽으며 지금 신화를 읽는게 아닌가 할 정도로 즐거운 책이었다. 시간이 난다면 부디 꼭 읽어보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