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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공연

[12/24]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화제의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팀원들과 함께 자료조사 명목으로 조조영화로 관람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종류의 이야기라서 볼 생각이 없던 영화였다. 그래서일까? 첫장면에서부터 무언가 알 수 없는 불편함이 밀려왔다.

 이 영화의 첫장면은 조병만 할아버지가 죽은 무덤에서 강계열 할머니가 서글프게 우는 장면을 카메라가 멀리서 잡으며 시작된다. 할머니를 훔쳐보는 듯한 화면이 롱테이크로 유지된 상태로 울음소리가 극장 안을 꽉 채우며 영화가 시작되는데, 내게는 그 장면이 유난히 불편하게 다가왔다.


그 씬을 보는 내 기분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았던 타인의 내밀한 모습을 강제로 내게 들이밀며 슬퍼하라고 하는 느낌이었고, 그 장면이 주는 불쾌감이 이후 펼쳐지는 알콩달콩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숨어있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몇번 졸다 깨서 영화를 다 본 것은 아니지만 왜 그렇게 내게 그 화면들이 답답하거나 불쾌하게만 느껴졌을까?


그것이 허구였다면 달랐을 것이다. 나는 훨씬 편한 마음으로 노부부의 이야기를 받아들였을 것이고 할아버지가 죽었을 때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그게 만약 픽션이었다면 애시당초 그 이야기가 흥행하지도 않았겠지.


물론 나는 이 다큐를 만든 분이 관음증적인 목표, 혹은 악의나 흥행에 눈이 멀어 이 다큐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소설이건 영화이건 사람들에게 공개되는 순간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만든 사람의 손을 떠난다. 불쾌감의 팔할은 이 작품이 처해있는 환경과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면서 얻길 원하는 것들 때문일 것이다.


이 노부부 로맨스의 가장 아름다운 지점은 두 사람이 아기같이 장난치는 모습이 아니다. 할아버지가 '아름답게 피었던 꽃은 언젠가 떨어진다'라고 말하는 장면과, 그의 죽음이 매우 가까이 다가왔지만 할아버지가 아직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가 그의 옷들을 미리 태우는 장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죽음을 저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니!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상당히 종교적인 작품이다. 로맨스는 많아도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것은 갈수록 찾기 힘든 세상 아닌가.


꽃이 시들고 떨어질 것임을 알기에 할머니는 그렇게 할아버지의 옷을 '미리' 정리할 수 있었게다. 또 그 긴 시간 얼마나 그런 준비를 해왔겠는가. 그러나 무덤에서 우는 할머니의 장면이 드러나는 순간, 혹은 그 장면이 도입부터 우리의 눈으로 들어오는 순간 죽음을 받아들이고자 하고 미리 준비하고, 삶의 일부로 준비하고자 했던 위대한 의지들이 그저 그런 멜로의 마지막 장면으로 내달리며 산화해버린 것 같은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었다. 한 개인의 아주 내밀한 비밀로 간직해야 하는 어느 순간이 몇백만 사람들의 오락이 되어버린 기분이 든 것이다.


나는 할머니가 꿋꿋이 울지말고 버텼어야 한다는 비인간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자기 삶의 일부로 죽음을 받아들였더라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덤덤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녀의 우는 모습을 꼭 담아야만 했을까? 그녀만의 것으로 남겨놓았다면 어떤 작품이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