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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공연

[보고 쓰다] 불안의 세계에서 프로가 되는 법 - 나이트 크롤러



나이트 크롤러 (2015)

Nightcrawler 
8.4
감독
댄 길로이
출연
제이크 질렌할, 르네 루소, 빌 팩스톤, 앤 쿠잭, 케빈 람
정보
범죄, 드라마 | 미국 | 118 분 | 2015-02-26


 켄 로치의 작품 중에 비교적 덜 알려진 영화인 [네비게이터]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영국에서 철도민영화 당시 한 구간의 철도노동자들이 민영화 과정에서 외적/내적으로 어떤 피해를 입게 됐는지 밀착된 시선으로 보여주는 영화다. 구체적인 스토리를 여기에 다 적을 수는 없으나, 나는 [나이트 크롤러]를 보면서 다시 [네비게이터]를 떠올렸다. [네비게이터]에서는 초반부터 끊임없이 드러냈던 사회적인 배경들(민영화로 인한 정리해고의 불안, 그에 따른 내부경쟁과 직업윤리의 소멸)이 [나이트 크롤러]에서는 비교적 간접적으로 제시된다는 차이가 있을 뿐 두 영화는 세상이 어떻게 실업이라는 공포를 만들고, 그 공포가 어떻게 인간을 싸이코패스로 만들어 나가는지 집요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는 작품처럼 보인다. 더불어 이 이야기들은 소위 '프로페셔널' 내지는 '성공학', 그러니까 소위 주류들이 말하는 성공의 비법들이 얼마나 비윤리적이고 허술하며 모순에 빠져있는지를 보여주는 파헤치는 작업이기도 하다.


 [네비게이터] 속 노동자들이 그저 평범하고 성실한 노동자들로 비춰지는 것에 비해 [나이트 크롤러] 속 주인공 루이스 블룸(제이크 질렌할)은 원래부터 싸이코패스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극 초반부터 좀도둑질을 일삼고 도무지 진위를 알 수 없는 화려한 언변으로 사람들을 꾀어낼려고 하는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후반부 딱 한번의 위기를 제외하면 전혀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는다. 그런 냉정한 모습은 극 후반부에 가서 그가 사건을 쫒아다니는 것을 넘어 사건에 개입하고 사건을 만들어내는 수준에 다다를 때면 역대급 싸이코패스의 증거로 확정된다. 그에게는 그렇게 행동을 하게 된 원초적인 동기라던가, 그가 원하는 방향이라는 것이 명확히 나타나질 않는다. 언제부터 그런 심성을 가지게 되었나? 그는 언론종사자를 지망하는 것 같은 눈빛을 하다가도 자기의 목표는 기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인물이며 관객 입장에서 납득되지 않는 연애를 시도하는 사람이다. 그의 캐릭터 탓에 어떤 점에서 그는 이 모든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배후세력 같아 보이는 수준을 넘어서, 영화속 인물들, 아니 영화속 세계의 욕망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단 한가지 초반부터 이 인물에 대해서 확실하게 주어지는 정보가 있다면, 그는 실업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보는 그 뒤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에게도 끊임없이 나타난다. 루이스 블룸을 돕는 저 불쌍한 인턴 '릭'은 그 자체가 실업이라는 재해에 시달리고 내버려진 인물이다. 언뜻 보기에 루이스 블룸보다 상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보도국장 리나도 2년 단위의 계약으로 인해 실업의 공포에 시달린다. 직업과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이들이 실업에 시달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 삶을 제대로 꾸리지 않았기에 (너는 도둑놈이라서 / 시청률이 저조하니까 / 널 채용할만한 이유가 없어서) , 보다 더 나은 성과를 내지 못했기에 그들의 발 밑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무직이라는 나락이 입을 벌리고 기다린다. 근데 사실, 릭이 후반부에 루이스 블룸에게 '사람다운 대접을 받고 싶다면 저를 사람처럼 대해줘야죠'라는 말은 그대로 세상에 돌려줘도 될 법한 말이 아닌가. '내가 삶을 제대로 꾸리길 바란다면 그런 기회를 줘야죠' 라고.



때문에 영화는 이야기 내내 이들 모두가 끊임없이 실업이라는 공포에 쫓기고 시달리는 인상을 준다. 여기서 실업이란 있던 직장을 잃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무직 상태'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루이스 블룸만은 그가 극 내내 보여주는 냉정한 모습 덕에 그런 공포에서 멀리 벗어났다는 인상을 주지만, 그가 리나에게 보여주는 뒤틀린 욕망이나 위기에 처했을때 보여주는 격렬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루이스 블룸 또한 이 공포에 무감각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 공포를 이겨내는 법은 무엇인가? [뉴스룸]의 세계라면 그 방법은 합심해서 멋진 진짜 뉴스를 만들어 내는 것일 게고, 과거의 사회에서는 사회연대라고 통칭할 수 있었던 고용안정,사회보장 등이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발판은 아무것도 없다. 특히나 이 영화 속에서는 다른 선택지는 '릭'과 현직 기자들,형사의 말을 통해 제시되느니 못한 푸념의 수준으로서 나타난다. (연봉을 올려주세요, 이것은 윤리에 어긋납니다, 범죄의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단 하나. 각자가 성공학에 따라 더 '프로페셔널' 해지는 방법뿐이다. 프로페셔널이라는 말은 목적지향적인 말이라고 대체 할 수도 있을 텐데, 목적을 달성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상황이 되면 목적 달성 자체가 윤리가 된다. 프로에게 소위 요구되는 '목적지향성'과 '직업윤리'가 다른 형태로써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자윤리란 무엇인가? 어떻게든 시청자가 원하는 것을 찍어서 보여주는 것이고 인턴윤리란 (그런 것이 있다면) 고용주의 말에 토달지 않고 시키는 것을 다 해서 정직원이 되는 것이며, 보도국장의 윤리란 어떻게든 시청률을 올려서 방송국에 광고수익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루이스 블룸은 뉴스가 원하는 장면을 찍어오는 것을 넘어서 주도적으로 사건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고, 릭은 길안내를 더 잘 해내야 하며, 리나는 현직 기자들의 윤리성이나 진실보도에 대한 요구를 무시하고 시청률을 최대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속 모든 인물들의 행동 동기는 오직 실업이라는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압력이며, 유일한 주인공은 공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포란 극에서 루이스 블룸이 말한 '진짜가 되는 거짓 증거'의 수준이 아니다. 무직의 공포란 자아정체감의 붕괴,생계의 막막함이라는 구체적인 현상을 수반하는 명확한 공포다. 하지만 그 공포의 역사성은 아마 이런 것일 게다. 하나의 경제기조에서 시작된 불안감이 안정된 사회연대를 무너뜨리고 양극화를 만들어냈으며 실업을 증가시키고, 슬럼가와 극단적 갈등을 탄생시켰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 미디어는 공포장사를 시작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과연 실업이 없었다면 루이스 블룸은 존재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볼수 밖에 없다. 그 공포와 잔혹함에 비한다면 그가 보여주는 비윤리성이란 그야말로 애들 장난인 수준이다. 실업없는 세계의 루이스 블룸이라는 것이 다른 영화 속에 있다면, 그것은 [네비게이터]에서 민영화 이전 철도노동자들이 보여줬던 따뜻한 연대의 모습과도 아마 비슷할 것이고, [네비게이터]의 마지막에 그렇게 따뜻하던 사람들이 동료의 시체를 소리소문없이 처리할때 느끼는 경악과도 비슷한 것이다

루이스 블룸 또한 공포의 산물이라면,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성공학을 따라 성공한 이들, 흔히 비윤리적이라고 칭해지는 기업가나 공직자들에 대해 저들은 적어도 소시민보다는 선택의 여지가 있기에 더 주체적인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 말은 어느정도 진실이지만, 실상 그들 또한 어떤 공포에서 달음박질 치거나,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압력에 노출된 것 또한 사실이라는 생각 말이다. 루이스 블룸을 사로잡은 것이 공포였던 것처럼.



 여기서 압력에 노출됐다는 말은 그들 또한 피해자라는 말이 아니라, 그들 개개인을 넘어서서 자꾸 그런 인간들을 상위에 올려놓는 근본적인 문제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이나 변영주의 [화차]를 보며 배웠던 것은, 첨예한 갈등을 만들어내는 원인이란 개개인의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그들이 처해있는 사회적 압력에 따른 것이라는 것, 때문에 개별 인간이 착하고 나쁜 것은 본질적 문제가 아니며 그 압력에 의해 '복수는 나의 것'이 되어 [화차]에 올라타게 된다는 점이 아니었던가? 같은 원리로 우리가 자주 착각하듯 개별 기업가와 공직자가 깨끗한 사람인 것만으로(착한 자본가,약자를 생각하는 대통령) 문제가 해결될리는 없다. 이 사회의 '프로페셔널' 혹은 '성공의 조건'자체가 그런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만약 루이스 블룸이 보도윤리를 준수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그 일을 계속 할 수 없었을 것이고, 결국은 뉴스의 생리에 따라 루이스 블룸이 했던 일을 다른 이가 했을 것이다. 적어도 그에게 그 일이 아니더라도 살아갈 다른 가능성, 혹은 안정성이 주어졌거나 직업윤리가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였다면 적어도 그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싸이코패스 같이 흘러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좌측에서 순서대로 화차,복수는 나의 것,나이트크롤러)

 

 사회가 일하는 이들에게 프로페셔널함을 요구할때, 그래서 그것이 어느 순간 윤리적 갈등에 우리를 내던질 때, 우리는 치열하게 목적을 위해 뛰는 것이야 말로 인간다운 모습이라는 변명을 자주 해 왔지만, 과연 영화 속에서 누구보다도 프로페셔널한 루이스 블룸과 리나가 단 한번이라도 인간다운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해보면, 그그 변명의 허무함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찌하리,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이에게 기다리는 것은 쓸모없는 인간이 된다는 공포요, 고용 불안정의 만성 실업 사회에서 프로페셔널이 되는 길은 결국 싸이코패스가 되는 길 뿐인 것을.